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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03. 2021

#93. 나는 커서 내가 됐을까

2021.01.03.

2021년 첫 연휴 마지막 날, 작업실에 왔다. 지난날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벽 한켠에 엽서를 붙였다. 얼마 전 위트 앤 시니컬에서 시집을 사고 받은 굿즈로 최승자, 허수경, 이제니, 한강 시인의 시구절이 적혀있다. 별뜻 없이 붙였는데 연결해 읽으니 하나의 새로운 시가 탄생한 것만 같아 여러 차례 곱씹어 읽었다.

이후엔 우디 앨런의 <원더 휠>을 봤다. 빔 프로젝터를 켜고 고타츠에 몸을 파묻은 채, 아이스라떼를 홀짝이면서 봤다. 영화 속 몇몇 지점들이 아 맞다, 내 ‘인생영화’는 이 양반의 <라디오 데이즈>였지, 상기시켰다. 아쉽게도 왓챠에선 제공하지 않아 재관람은 못했다. 언젠가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꼭 상영회를 열리라.

다음으론 오은 형과 재수 작가님이 함께 쓰고 그린 그림시집 『마음의 일』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화되어 페이지들을 한달음에 내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만을 오직 간절히 바랐던 유년의 내게 꼭 쥐여주고팠다. 깜깜한 염세의 늪이 깜감했다가 감깜했다가 어느새, 감감 저만치에 보일 때까지 나아갈 힘을 주는 그런 작품이었다. 선물하고픈 얼굴들이 여럿 그려져 심장이 법석였다.

불현듯, 십수년째 되뇌는 나는 커서 내가 됐을까, 란 물음도 따라왔다.

토요일엔 누나의 승진과 매형의 생일을 기념한 축하연이 있었다. 부모님은 방어회를 비롯 저녁 식사를 사러 가셨고 케이크는 내 몫이었다. 조카들이 딸기 케이크를 원한다기에 근처 빵집 몇 군데에 전화를 돌려보니 전부 품절이었다. 전에 맛있게 먹었던 게 떠올라 피오니에 연락했다. 재고는 있으나 따로 예약은 받지 않는다기에 후다닥 채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아이들에겐 가능한 좋은 걸 주고 싶다.

가까스로 케이크를 구하고 샴페인을 한 병 사서 귀가했다. 한숨 돌리고 있으니 기꺼운 소란이 찾아왔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양 부모님들은 조카들을 반겼고 나도 얼른 카메라를 들고 합세했다.

셔터를 누르는 데 첫째가 물었다. “삼촌 설마 내가 만든 팔찌를 버린 건 아니겠지?” 이 말은 우리 둘의 2020년의 끝, 2021년의 처음을 장식한 인사가 되었다. 나는 짐짓 놀란 척 눈을 크게 뜨고 헉, 소리를 내며 입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나를 따라 마른 세수를 하려는 찰나 소매를 걷어 손목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눈이 나란히 반달이 됐다.

케이크는 둘째가 특히 잘 먹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듯했다. 누나와 매형은 “도준이가 이렇게 케이크 잘 먹는 건 처음 봐!”하며 놀랐다. 내심 뿌듯해 “입이 고급인가보다” 하니 가족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1월 1일 아침엔 왕자와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 이로써 신년에 같이 등산을 한다는 리추얼을 3년째 이어나가게 됐다. “형, 이제 우리 둘이 합치면 일흔둘이야” “야, 그럼 처음엔 마흔둘이었네” 새삼스러워하며 가파른 경사를 올랐다. 정상 즈음에서 만나 여러 마디를 나눈 등산객 아저씨와 작별을 고한 뒤엔 “형, 어쩌면 저분이 산신령일지도 몰라” “2월의 한라산이 제일 멋지다고 하시던데, 한라산에서 또 마주치면 드시고 싶은 거 다 사드려야겠다” 등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하산했다. 왕자는 내가 산행 내내 노래를 불렀던 잔치국수를 사주었다. 저녁부터 동이 틀 무렵까지는 제임스를 포함해 넷이서 대화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피곤했지만 그가 있어 근사한 시간이었다.

오늘 홀로 긴 동안을 보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 전 책장을 덮던걸, 어제 연남동행 버스에 오르던걸, 새해 첫날 형제들과 악수를 나누던 걸 되새겨서다. 작업실 곳곳을 찍은 사진들을 제임스에게 보냈더니 그가 작업실 인스타 계정에 #흔적과마음들 이란 해시태그와 함께 올렸다. 하트를 눌렀다.

나는 커서 내가 됐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내가 되었나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련다. 비로소 흔적을, 마음을, 흔적의 마음을, 마음의 흔적을, 그 모든 흔적과 마음들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내가 되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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