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ungJae Shin Jan 06. 2021

#94. 내 기억의 무늬

2021.01.05.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죽은 이들이 천국으로 건너가기 전 7일간 머무는 중간역 림보를 배경으로 한다. 망자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기억 중 가장 소중한 단 하나를 고른다. 림보의 직원들은 그것을 짧은 영화로 재현한다. 직원들의 정체는 극의 말미에 밝혀진다. 열아홉 때 처음 감상한 이래 같은 질문을 많이도 했다. 너는 어떤 순간을 끝까지 간직할 거니? 남에게 그리고 나에게 정말 많이도 물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예상과는 다르게 기쁘거나 영광스럽거나 환희에 찬 순간 대신 외려 조금은 슬픈 순간을 고르는 비율이 높았다는 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일곱 살, 태권소년이었던 나는 승급 시험을 위해 국기원까지 먼 길을 떠나야 했다. 태권도장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이동했는데 나를 뺀 모든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였다. 당시에도 내 인식에 엄마, 아빠는 매일 회사를 가는 사람이었기에 딱히 괘념치 않았다. 버스 중간 즈음 홀로 앉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을 구경했다. 엄청나게 큰 체육관, 끝도 없이 펼쳐진 도복 자락들. 들뜸 반 긴장 반으로 품새도 선보이고 생전 처음 보는 아이와 겨루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돌아오는 버스 안, 같은 자리였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휴게소에 섰을 땐 하늘이 정말 붉었다. 졸다가 깨서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다. 대각선 앞자리에서 어떤 형과 그의 엄마가 먹던 만두 냄새였다.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던가. 집을 나설 때 할머니가 호주머니에 찔러 준 천원 한 장이 생각났다. 차에서 내려 똑같은 만두를 사 왔다. 뚜껑을 열고 그 위에 간장을 붓고 이쑤시개로 만두를 먹었다. 뜨거웠다. 맛있었다. 모험을 하는 듯해 신도 났던 것 같다. 아홉 시가 다 되어 귀가해 할머니와 엄마, 아빠에게 무용담을 들려준 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누나는 진작에 한밤중이었다. 그땐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때를 떠올리면 그때의 내가 짠하다. 그래서 난 노을 아래, 휴게소에 정차한 버스 안. 그날 그 순간의 나를 마지막까지 품고 갈 것이다. 오늘 점심 스튜디오 겸 필름현상소 망우삼림(忘憂森林)에 들렀다. 유현이가 현상을 맡기는 동안 내부를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 현상이 완료된 필름들 틈으로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버스 안의 내가 저랬을까? 오랜만에 그날을 되새겼다. 실제로 내가 본 건 소년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망우삼림. 나쁜 기억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숲이란 뜻이다. 기억하고 기록하려 사진을 찍은 이들이 찾는 공간의 이름이 무언가를 잊게 해주는 곳이라니. 곱씹어보니 그게 기억의 본질인 것도 같다. 잊고 싶을 만치 나쁜 기억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조그마한 생채기일지언정 제때 치유하지 못하면 흉터로 남는다. 얼룩이 져버린다. 하지만 그걸 다른 좋은 기억들로 잘 덧칠한다면 결국 스스로를 상징하는 고유한 무늬가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좋은 기억을 쌓기 위해 애써야만 할 테다. 내 선택은 여전히 변함없고 그 시절의 나는 언제까지나 소중하다. 하지만 자꾸 이런 상상이 깃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흘리는 저 아이에게 등을 토닥여주려 가까이 다가가면, 왁! 하고 뒤돌며 있는 힘껏 웃어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어쩌면 이미 현실이 되었는지도. 눈을 감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장면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까닭이다. 내 기억의 무늬는 분명 근사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93. 나는 커서 내가 됐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