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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06. 2021

#95. 행복은 귀찮음 순

2021.01.06.

학창시절의 깨달음이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하라는 것들부터 해야 삶이 즐겁다’였다면 삼십대가 되어 얻은 깨달음은 ‘귀찮음을 무릅쓸 때 인생이 풍요로워진다’이다. 원체 쫄보였던 터라 전자는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채 교복을 벗고 말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머저리는 되고 싶지 않기에 후자는 가능한 빈번히 되새기고 있다. 사람들이 나더러 “그거 너무 귀찮지 않아?” 묻는 게 여럿 있는데 그것들은 대개 내가 좋아하는 루틴들이다. 먼저 면도. 난 털보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수염이 많다. 수염을 기르지 않을 때는 매일 면도를 했다. 요즘은 회사에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데, 역시나 매일 면도를 한다. 트리밍도 면도의 일종이니까. 제모를 하지 그러냐, 아침마다 면도하느라 괴롭지 않냐 등 성별과 나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숱하게 들은 말인데 나의 대답은 “전혀”다. 마치 양치처럼 이미 너무 익숙해지기도 했고, 적응 여부를 떠나서도 면도는 꽤나 즐거운 일이다. 뜨거운 물로 세안하고, 아 그전에 헤어밴드부터 차고, 면도기를 더욱 뜨거운 물로 소독하고 쉐이빙 폼을 바르는 순간. 면도날이 지나갈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천천히 다듬는 순간. 거품을 씻어내며 제대로 되었나 살피는 순간. 모든 과정에 나름의 쾌감이 있다. 물론 가끔 삐끗하면 에라 모르겠다 확 밀어버리지만, 며칠이면 원상복구가 된다는 점도 흡족한 포인트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 수염이 어느 정도 자란 모습을 선호하기도 하고. 또 털 이야기인데, 다음은 헤어다. 최소한 3주에 한 번은 머리를 다듬고 분기마다 염색을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미용실 가기가 귀찮아 더벅머리를 감내하는 이들도 더러 있는데, 십분 이해한다. 나도 스물여섯 해를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젠 3주가 다가오면 본능적으로 안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여차저차 시기를 놓치면 외려 스트레스가 쌓인다. 진짜로 머리가 무겁게 느껴진다니까? 반곱슬을 타고난 덕에 헤어 세팅에는 거의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는 건 다행스럽다. 머리 감고 대충 말리고 에센스 슉슉 바르면 끝이다. 소요 시간은 도합 10분 남짓? 아마 나도 더 이상의 공수는 못 들일 거다, 귀찮으니까. 이외에도 다양하다. 턱걸이부터 일일일팩, 홈트레이닝, 글쓰기, 팟캐스트 만들기, 요샌 늘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까지. 일견 귀찮은 것도 같다. 그래도 그만둘 마음은 전무. 모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귀찮음순이 아닐까 싶게 만드는 것들이니까. 참 극복이 안 되는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먹는 일이다. 평균보다 적게 먹는 편이기도 하거니와 식도락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래서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다가오는 7월 독립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때를 위해서도 미리 익혀두면 좋을 것 같아서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관석에게 이 계획을 전하고 “지도 편달을 바랍니다”했더니 야매요리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학원에 등록하기를 권했다. 곧이어 “사실 어머니가 짱이니 어머니 곁에서 배우라, 본좌도 고향집에 갈 때마다 매번 놀란다”고도 전했다. 학원도 다니고 엄마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봐야지, 이 문장을 타자기로 치는 데 거실에서 묘한 음악이 들려 나가봤더니 마침 엄마가 소파에 앉아있다. 인도의 전통 관악기인 ‘반수리’ 연주곡이 담긴 씨디를 듣고 있다. 옛날에 즐겨 듣던 게 떠올라 아마존에서 구입했단다. 사이트에 접속했는데 한국어가 나와서 어딘가 못 미더웠다며, 웃는 낯으로 음악 좋지 않냐 묻는다. 어쩌면 난 삼십대가 아니라 날 때부터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귀찮음을 감수하는 만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인생의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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