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나를 가장 자주 찾는 사람은 은율이일 것이다. 곰곰 세어보니 아빠, 아빠 하루에 50번쯤은 부르는 듯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는 “아빠 해 보세요” 애원해도 도리질을 치며 기어코 “엄마”만 외쳤었는데, 그때가 정말로 전생 같다는 느낌.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생애’가 전생이라면 은율이가 아빠를 찾기 전의 삶이 일종의 전생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밤에 함께 눈을 감고 아침에 함께 눈을 뜨는 이가 바뀌었고, (몸)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는 대상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고, 절대적인 시간과 체력과 마음을 쏟는 대상이 바뀌었으니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은호는 참 씩씩하다. 벌써부터 형 노릇이 하고 싶은지 “형아가 알려줄게, 해줄게”, “은율아 그러면 안돼”, “은율아 형아 손잡고 가야지”하며 동생을 이끌고, 매일같이 “은율아 사랑해”하며 껴안는다. 물론 소유권과 질서 분쟁이 끊이지 않지만, 그래도 둘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모습은 대체로 흐뭇하다. 오래오래 아껴가며 감상하고 싶을 만큼.
반추해 보니 은율이가 아빠를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말이 부쩍 늘었다. 엄마와 까까의 세계가 엄마와 까까와 아빠와 딸기와 거품과 미션과 안녕 등등등의 세계로 매순간 확장되고 있달까. 엊저녁엔 뭐였더라, “홍삼젤리”라고 정확히 발음했던 것도 같고.
은호는 이미 달변가의 자질이 엿보인다, 고들 한다. 다른 아이를 키워 본 적 없으니 비교할 데이터가 내겐 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그리들 얘기한다. 은호가 또래에 비해 말을 참 잘한다고. 내친김에 따뜻하고 다정한 말씨로 아름답고 다양한 어휘를 활용할 줄 아는 아이로 길러 주고 싶다. 거기에 기분 좋은 위트가 더해진… 후… 부모 욕심이란 게 이런 거구나.
어제 할아버지 집에서 잠을 잔 은호는, 은율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게 “아빠 잘 가, 잘 자고 내일 만나”라고 인사해 주었다. 잠들 때면 꼭 아빠를 찾던 때도 있었는데 하하.
일본의 어떤 샴푸 광고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이가 “오늘부터 샴푸는 내가 할게”라고 말하고, “그래” 대답한 화자는 어제가 마지막으로 도와준 날이었음을 깨닫는 장면.
수민과 나도 같은 처지일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마지막의 자리를 차지했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부지기수일 것이고, 어쩌면 그것에 아쉬워하고 감상에 잠길 정신조차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머리를 닦아줄 수 있으니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조금 남았다고 안심하는 광고 속 화자처럼, 다만 가능한 만큼의 사랑을, 있는힘껏 주고받으면 될 일이다. 마지막보다는 아이들이 안겨주는 처음이 훨씬 많을 테니,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2026.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