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을 세우자

2026.03.17

by SeungJae Shin



은호는 늘 협상한다. 1분만, 한 번만, 쪼끔만. 시간과 빈도와 정도를 아는 아이라니, 감탄하는 건 아니고, 그저 나 역시 협상에 동참할 따름이다. 마지막이야, 진짜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매번 밑진다고 밑져 주었는데도 이따금 은호는 뚝뚝 눈물을 흘린다. 이번이 진짜로 정말로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아쉬워하면서.


엊저녁에도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엄마, 아빠도 버리고 저만치 뛰어가는 은호를 들쳐 업고 귀가하는 길, 내일 아침이면 어린이집에서 또 만나 부대낄 텐데 무어가 그리 간절한지 온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대던 은호. 붉은 불빛을 번쩍이며 서 있던 구급차를 구경하는 걸로 겨우 달랬지.


무한정 받아주고 싶지만 육아를 하다 보면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특히 내가 바쁘고 피곤한 상태라면 더더욱. 나에게 하찮아 보이는 일이 아이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두근두근함일 수 있음을, 나에게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 아이에겐 생전 처음 마주하는 풍경일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안다고 믿으면서도, 아이들을 내 쪽으로 잡아 끌게 된다. 그러다 가끔은 화가 끓어올라 주체를 못하게 되고, 사소한 일에 버럭 화를 내곤 자괴감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장송의 프리렌>을 읽다 문득 ‘힘멜-되기’에 도전해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왕을 무찌른다는 대의만큼이나 마을사람들의 사소한 심부름을 중시하는 용사 힘멜처럼, 나도 아이들의 사소함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지. 하긴, 아득한 마왕의 존재보단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는 게 더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계단에 앉아 포크레인과 레미콘이 지나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미세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봄. 더위를 피해 들어간 주차장에서 크게 이름을 외치며 “이게 메아리야” 알려주다 이웃 주민과 눈이 마주쳤던 여름, 엄마에게 선물할 예쁜 낙엽을 고르려다 매미 껍데기만 가득 주머니에 담아온 가을, 칼바람에 맞서 그네를 타다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던 겨울.


돌아보니 계절의 방점은 모두 은호의 “1분만”으로부터 비롯됐다. 천 년을 넘게 사는 엘프 프리렌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 용사 힘멜 일행과의 10년간의 여행, 그러니까 그녀 인생 전체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그 짧은 나날이었던 것처럼.


시시한 모험을 추구하는 힘멜이 잊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동상을 세워두는 것. 공명심의 발로라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리 한다. 사실 그보단 자신들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질 프리렌이 조금은 덜 외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앞으로 은호에게 더 많은 1분을 내어주어야지, 그게 그의 기억 속 내 동상이 될 지도 모르니까.


협상가 은호와 달리 아직 말이 서툰 은율이는 그저 요구할 따름이다. 그의 매직 워드는 ‘또’. 하늘 높이 던져주거나 아빠표 셀프 자이로드롭을 태워주거나, 좋아하는 블루베리를 먹을 때도 은율이는 특유의 눈웃음을 치며 또, 또, 또.


그래 우리 또 하자. 비록 아빠가 마왕을 무찌를 용사는 못 되지만, 우리만의 시시한 모험을 하고 하고 또 해서, 서로라는 세상 속에 그때그때의 우리의 모양을 한 동상을 잔뜩 세워두자. 아마도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일 테니 말야.


언젠가 만화방에서 함께 <장송의 프리렌>을 감상할 날을 기다리며,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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