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엔딩

후지산 여행기, 둘

by SeungJae Shin

태풍이 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폭우였다. 웬만하면 원래 예정대로 후지큐 하이랜드에 갈 계획이었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일기예보를 검색해보니 기세가 조금 꺾이는 내일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허탈한 마음에 같은 방에 묵는 일본인 아저씨에게 등반 장비가 없어도 후지산을 오를 수 있느냐 물었더니 위험천만한 일이라며 만류했다. 허투루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욕심에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빗방울은 여전히 거셌고 바람도 만만찮은 아침 여덟 시. 반바지에 반팔 티, 조리 차림의 나는 조그마한 3단 접이 우산을 들고 동네에서 가장 큰 신사를 향해 마냥 걸었다. 온몸이 다 젖어가며 삼십 분쯤 걷고 나서야 이게 미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정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여행을 왔다는 이유로 앞뒤 분간 못하는 내가 우습기도, 가엾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숙소로 돌아온 시각 아침 아홉 시. '세상 일의 만만찮음의 평범성'을 체험한 나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오늘 하루 그냥 쉬기로 결심했다. 적당히 몸을 추스르고 침대에 누워 우디 앨런의 영화 <이레셔널 맨>을 봤다. 재미있었다. 영감이 엠마 스톤을 새로운 뮤즈로 택한 것이 그럴듯해 보였다. 귀족적이면서도 말괄량이 같은 마스크와 우아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배우다.


영화가 끝나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열한 시를 지날 무렵이어서 가까운 라멘집에 들어가 런치세트를 주문했다. 돈코츠 국물에 다시마, 미역 등이 섞인 라멘과 볶음밥이었는데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카페에서 책이나 읽자 하며 지도를 뒤져 ‘리틀로봇’이라는 곳으로 갔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시며(메뉴를 착각해 잘못 시킨 것이긴 하지만) 몸을 녹이고(여긴 비 오면 춥다) 독서를 즐겼다.


비를 뚫고 다녀 피로가 쌓였던지, 세 시쯤 잠깐 눈을 붙이자 하고 누웠는데 깨 보니 일곱 시였다. 비가 그쳤길래 자전거를 끌고 호수 쪽으로 페달을 밟았다. 이미 해는 졌고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로등도 꺼진 좁고 어두운 길을 달리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무척 많았다.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지금 이 순간이 오늘의 대미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사한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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