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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26. 2016

Bull:Shit

Writing Photo, 8

무언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스타트 포인트에 대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방영되기를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데 별 쓰레기같은 광고들만 몇 시간씩 연달아 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채널을 돌릴 수도, 누군가를 재촉할 수도 없고, 아니 무엇보다 대체 어떤 영상이 눈앞에 펼쳐질지조차 모르는데, 단지 ‘무언가가 시작된다, 곧’ 이 느낌만이 시끄럽게 쿵쾅거렸다. 그것은 다가오는 것이기도 했고 떠나가는 것이기도 했다. 두 동사 사이의 괴리, ‘가까워짐과 동시에 멀어짐’이라는 형용모순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것은 점점 나에게로, 나에게서 오고 또 가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정체불명의 그 감각에 나는 사정없이 휘청거렸다. 저항은 저 너머의 단어였다. 발버둥은 대상이 명확할 때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 때문에 한가지 실험을 해봐야겠다 마음을 먹기까지도 꽤나 오래 걸렸다. 내가 나의 위치를 옮기면 어떻게 될지, 이것은 어디까지 나를 쫓아올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사고의 범주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무작정 향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다.


개소리다. 나는 도망쳐왔다. 말 그대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다가오는 것을 맞이할 배짱도, 떠나가는 것을 추적할 용기도 없었다. 안절부절, 우왕좌왕, 갈팡질팡. 삶의 중심을 잡지 못 했다. 스스로가 온몸으로 파도를 접수하는 해암(海巖)이라고, 부드럽게 바람을 흘러 넘기는 갈대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자기기만의 나날들. 응석받이. 평지풍파도 모르고 살았으면서 “나는 늘 쓰나미에 휩쓸리는 인생”이라며 어처구니없는 자학의 시를 써내려가던 얼치기. 이제라도 정말로 솔직하게 고백해야겠다. ‘다가오면서 떠나간다’는 번지르르한 수사(修辭)부터가 내 비겁함을 가리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음을. 그런데, 도망치는 게 나쁜 거야? 진득하니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는게 내 타고난 성정인 것을,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부유하는 게 내 천성이라고, 일단은 피하고 보는 게 내 본능이라고, 도망자에게는 도망자만의 호흡법이 있다고, 나는 3인칭으로 살고 싶다고, 당사자 따 따위 되고 싶지 않고 관찰자로 남고 싶다. 그보다, 왜 내가 세상을 설득해야 하지?


Writing. by 승재


Writing Photo, 8. @J임스

수많은 차량과 경적소리 사이에서도 남자는 유유히 제 갈길을 갔다. 한 마리 소가 그런 그를 따라갔다. 가로등보다 헤드라이트가 더 밝았던 그 도로에서,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이윽고 계속 앞으로 걸음 하는 사내를 두고 소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밤 골목으로 사라졌다.


Photo. by 임스


승재가 쓰고,

임스가 담다.


함께 서로 쓰.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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