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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임스 Dec 20. 2016

내 빛바랜 영웅에게

Writing Photo, 7

형,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참으로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건네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과 재작년 친척의 결혼식 자리에서 어색한 미소로 악수를 나눈 것 외에는 근 15년 이상 교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곰곰 따져보니 제가 중학생이 된 이후론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네요. 세월이 정말 빠릅니다.


인생이란 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나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그렇습니다.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잠깐 눈을 돌리면 금세 이만치 멀찍이, 혹은 가깝게 거리가 바뀌어 버립니다. 우리 사이에서 술래는 어느 쪽이었을까요?


일과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 저희 집 강아지 마롱이는 늘 한달음에 달려 나와 저를 반겨줍니다. 오늘도 녀석은 어김없이 제 위에 올라타 제 얼굴을 마구 핥았습니다. 꼬리에서 느껴지는 살랑살랑 바람과 진동은 늘 기껍습니다.


마롱이의 격한 환영을 받아낸 뒤 샤워를 하는 데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저렇게 기뻐서 어쩔 줄 몰랐던 순간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머릿속 초콜릿 박스를 이리저리 헤집어 간신히 하나를 꺼냈습니다. 형이었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 봄학기 종업식 날. 최초로 맞이하는 여름방학에 대한 부푼 기대가 억지로 끌려가야만 했던 피아노 학원에서의 수업 때문에 폭삭 주저앉은 상태였습니다. 봉고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데, 웬 낯선 사람이 내 자전거 위에 앉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대략 5초 간 저게 대체 누구지, 하고 의아해하던 저는 그게 형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대성박력으로 "행님아" 외치며 형의 품으로 점프했었지요. 외할머니께 '다녀왔습니다'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모험을 떠났습니다. 뒷자리에서 만끽하던 형의 스피드는 어찌나 대단하던지, 형의 등은 또 얼마나 넓었던지.


그날, 우리는 아파트 단지와 대로변 중간에 조성된 풀밭을 탐험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저 혼자서는 감히 와 볼 엄두를 못 내던, 문자 그대로 미지의 공간이었습니다. 용감한 형 덕분에 덩달아 저도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곤충도 잡고 수풀도 헤치며 거침없이 걸음을 내딛던 우리는, 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맣고 동그란 공간에 멈춰 섰습니다. 내리쬐는 뙤약볕도 침입하지 못하는, 어딘지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서늘했던 그곳에서 형은 “여기는 우리 비밀 아지트다, 다음에 또 오자”하고 선언해주었습니다.


제가 당시 형의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야 저는 그곳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러니까 4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그 사이에 왜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는지, 그날엔 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는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고민이라도 있었던 걸 테죠.


그러니까 형, 우리 둘만의 아지트 한가운데에 ‘똥’이 있었던 겁니다.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크기의, 똥 무더기가. 볼일이 급했던 어떤 이에게 그 장소는 구원이자 낙원이었던 거겠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래봤자 그것은 똥이었습니다. 똥이요, 똥.


어쩌면 삶이라는 게 이런 것 아닐까요?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신나는 일로만 가득할 줄 알았던 유토피아의 여기저기에 똥이 널려 있다는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 말입니다.


형, 요즘 제법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따로 연락을 드리지 못 했습니다. 저의 우상이었던 형의 움츠린 어깨와 맥이 풀린 눈빛을 저는 외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게 단 하나 있다면, 그건 이미 우리가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느낌이겠죠. 쓸쓸한 밤입니다.


올겨울, 사상 최악의 한파가 몰아칠 것이라고 합니다. 부디 건강 챙기시길 바랍니다.


Writing. by 승재


Writing Photo, 7. @J임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슬라이드 필름을 카메라에 감았다. 어떤 결과물을 얻게 될지, 사실 잘 알기가 어려웠다. 노출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ISO도 조금 감감하기로 했다. 경험과 감각에 의지한다는 것은 불안하면서도 그만큼 짜릿하다. 그렇기 때문에, 삶도 꼭 그렇지 않은가.


Photo. by 임스


승재가 쓰고,

임스가 담다.


함께 서로 쓰.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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