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 Photo, 11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놓인 점들의 자취.
늘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 일쑤였던 중학교 수학 시간, ‘원’을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선생님도, 친구들도 적잖이 당황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의 교육은 대체 무엇이었느냐고, 진작에 좀 이렇게 가르쳐줬으면 좋지 않았겠느냐고 일갈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졸다가 경기를 일으킨 척 머쓱해하며 도로 엉덩이를 붙였다. 다행이었다. 그때 대거리를 했더라면 난 졸지에 수학을 사랑한 괴짜로 특별 케어를 받아야만 했을 테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수학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으로 사전을 뒤적이며 삼각형, 사각형 등의 뜻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차라리 ‘넘어지기 전에 한 발을 내딛는 행위의 연속’, ‘점프의 반복’과 같이 걸음과 뜀을 풀어쓴 말에 더욱 마음이 갔다. 수학은 무슨, 그냥 원의 정의가 유독 멋있었던 것뿐인 게지.
이후로 난 스스로를 구심점으로 놓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원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애썼다. 가족, 친구, 세상과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은 반지름. 나 자신의 가능성은 지름. 그리고… 끝. 공부를 안 했으니 언어도 빈약할밖에.
이런 사고방식이 단순하기는 해도 그 나름 명쾌한 구석도 있고, 위안도 됐다. 동그라미는 내부에 생채기나 발자국이 부재한 편이 더 보기가 좋으니까. 원처럼. 인생은 적당히 떨어져 외로운 편이 낫다고 끄덕일 수 있으니까. 괜히 내 앞날을 과대평가해 기대감에 부풀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나만의 원심(圓心)력이 되어줬달까.
어둑어둑한 밤의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을 즐기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발갛게 타오르는 부분이 마치 원의 중심을 실체화한 모습 같아 안정감을 주었다. 연기가 퍼져나가는 범위가 곧 내 삶의 넓이가 아니겠느냐는 그럴싸한 상념에도 잠겼다. 삼차원, 사차원 복잡한 일상을 잠시나마 평면으로 만들어주는 듯도 했고. 본디 원은 이차원에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어젯밤,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일을 마무리한 뒤 언제나처럼 반딧불이를 허공에 띄우려는데 저만치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동양인 남자.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곳에 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괘념치 않고 시선을 거두었는데 차츰차츰 인기척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나를 찍고 있는 것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뭐지?'
렌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뭐랄까 원과 원이 단 하나의 점에서 서로 맞닿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감정을 표현해내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건 감정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저 최초로 맞이하는 상황? 상태? 사건? 애꿎은 눈알만 세차게 굴리며 집중하는 찰나 그는 미끄러지듯 내 옆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여행자의 카메라에 새겨진 한문으로 짐작되는 두 글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건 대충 이렇게 생겼었다. 吸緣.
어쩐지 잊히지 않는 저 요상한 그림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걸까. 궁금하다. 吸緣이라.
Writing. by 승재
스스로 애연가가 아니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사람들의 흡연하는 순간을 담고 싶다. 흡연을 미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몸에 해로울 것을 알면서도 한 호흡 크게 들이마시는 들숨에는 명상가 못지않은 무심(無心)함이 느껴진다. 가늘고 길게 뱉어내는 날숨에는 생각의 타래가 조금은 풀려나가는 듯한 해방감도 있다. 그러나 사진가로서 자꾸만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것은 들숨과 날숨의 사이, 그 아주 찰나(刹那)의 순간이다. 한 호흡에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있다. 그리고 그 경계는 모호하게 통합되며 하나의 원을 만든다. 삶 또한 이와 같으리라. 무언가로부터의 거리는 알고 보면 서로 모두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Photo. by 임스
함께 서로 쓰.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