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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Mar 31. 2017

나는 그 노래를 들었다

Writing Photo, 13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르자.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후미진 공간에서, 귀 기울이는 이 하나 없을지라도 그렇게, 오직 나만을 위한 노래를 부르자.”


사춘기, 지독하게도 마음을 후벼 파던 열등감과 허무함을 달래는 처방전이 있었다. 바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던 10차선 도로 옆을 하염없이 걷는 일이었다. 집채만 한 트럭부터 한껏 쇼바를 올린 오토바이들이 새벽녘까지 만들어 내던 잔광과 소음이 어떤 담요보다 더욱 포근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목청껏 노래만 불렀다. 뒤척이는 법을 모르는 갓난쟁이가 진공의 장롱 속에 자리를 잡고 누운 듯, 음표가 되기엔 멋쩍은 소리들을 토해냈던 것이다.


스스로가 유일한 청중이었던 그 열창의 시간들이 당시 내겐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동공을 가득 채웠다가 흘러가기를 되풀이하는 불빛들이 자아내는 기묘한 리듬에 몽롱해진 나를, 성미 급한 이들의 서로를 향한 재촉이 빚어낸 불협화음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숨겨 주었기에.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돌아보면 나를 옥죄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던 감촉의, 헤아릴 길 없는 겹겹의 암막이 말이다.


위태로운 평화였다. 언제고 누구든 커튼을 불쑥 열어젖힌 뒤 내가 여전히 중력에 발목을 잡혀 있음을 일깨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내 그림자를 밟는 모든 존재가 나를 위협하는 불청객이었다. 나는 인기척을 느낄 때마다 어김없이 움츠러들었고 호흡을 배꼽까지 억누르고 입을 틀어막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눈을 내리깔던 몇 초가 왜 그리도 더디게 흐르던지.


발걸음을 재촉하고 행로를 급선회해봐도 열려버린 문이 쉽게 닫힐 리는 만무했다. 화들짝 놀라 낮잠에서 깨버린 길고양이라도 된 듯, 한동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사방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나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가끔은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자유롭고 싶다, 그저 그 뿐이었는데.


지나간 일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고 세월은 흐르고, 머리도 기억도 듬성듬성. 시야가 충분히 흐려질 만큼 실눈을 떠야만 그 시절을 상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전혀 다른 인간이 된 채로. 베르테르 혹은 햄릿 혹은 무엇도 아니었던 나는 사라지고 가슴 속 폐허도 이미 무너지고 세우기를 반복한 뒤다. 그때의 나는 어디에도 없다. 그립 지도 않아.


이삿짐을 정리했다. 오래된 서랍장을 뒤적이다 색이 누렇게 바랜 앨범을 발견했다. 할머니가 나를 위해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다. 바닥에 주저 않아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겼다. 핏덩이의 나, 누나의 분홍치마를 입고 골목에 선 나, 시소에 올라서 의기양양 미소를 머금은 나, 처음으로 맞은 여름방학에 신이 나 춤을 추는 나, 그리고 그리고 아, 대로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 나.


사진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할머니의 시선들. 꿈틀거리는 감정을 외면하려 재빨리 다음 장을 펼쳤는데, 거기 그녀가 있었다. 1월 12일, 내가 태어난 지 열일곱 해가 되던 날. 식사 약속을 까맣게 잊고 정처 없이 떠돌았던 그날, 그녀는 그곳에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무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듣고 있느냐 묻지도 않고 그렇게, 그렇게.


Writing. by 승재


Writing Photo, 13. @J임스

몇 해 전 즈음인가. 필라델피아(Philadelphia)를 방문한 적이 있다. 리딩 터미널 마켓(Reading Terminal Market)이라고 하여, 100여 년을 훌쩍 넘긴 마켓이 있다. 오래된 역사치고는 꽤나 세련되게 변모한 마켓의 구석구석을 살피다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그녀를 찾았다. 연주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무난한 그런 선곡. 다음 곡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의 집중력만큼은 대단했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몰입에 이끌려 그렇게 가만히 여섯 곡을 내리 듣고서야 5불을 박스(Box)에 넣고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아마 두어 번 더 뒤를 돌아본 것 같지만.


Photo. by 임스


승재가 쓰고,

임스가 담다.


함께 서로 쓰.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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