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주의보가 흘러나오던 여름밤
‘하나미치’는 은호가 집과 학교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동네 해변 끄트머리에 있는 야트막한 동산을 빙글빙글 오르다 보면, 갑자기 숲의 그림자가 물러나고 눈이 따가울 정도로 볕이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이 오는데, 하나미치는 그렇게 ‘번쩍’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은호는 일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뒤에야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그 책방을 좋아했다. 느긋하게 바다를 바라보며 낮잠을 청할 수 있는 2층 테라스도 은호의 마음에 쏙 들었지만, 그보다는 천장이 높고 항상 새로운 책들이 책장에 그득그득 쌓이는,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정갈하게 정리된 1층이 더 좋았다. 언젠가 나도 이런 곳을 갖고 싶다, 고 늘 되뇔 정도로.
은호가 하나미치를 그렇게 자주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그곳이 아름다서만은 아니다. 하나미치에는 은호가 제법 멋지다고 느끼는 몇 안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미치의 주인장, 서진이었다. 키가 껑충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을 것이라 짐작케하는, 언제나 덜 깎은 턱수염과 약간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고수하지만 의외로 또 옷은 흠잡을 만한 구석 없이 깔끔하게 차려입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를 온 주말 홀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들른 그곳에서 서진을 처음 봤을 때 은호는, 그가 일본 영화에 나오는 오사카 출신의 게이바 사장이나 아니면 오키나와 버전의 조르바 같다고 생각했다. 흥미가 동한 은호는 이리저리 내부를 둘러보다 서진에게 대뜸 먼저 말을 걸었다. 은호에게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혹시 여기 이름은 <슬램덩크>에서 따온 건가요? 강백호가 일본 원작에서 이름이 사쿠라기 하나미치던데.”
서진은 그때 카운터 겸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이른바 ‘서진 존’이라 불리는 2평 남짓한 그 공간은 하나미치에서 유일하게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구역이다. 한창 무언가를 쓰던 서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은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음···, <슬램덩크> 좋지. 언젠가 일본어를 참 잘하던 친구랑 대화를 하는데 <슬램덩크>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어. 누구를 제일 좋아하는가부터 베스트 5 라인업을 짜면 어떻게 짤 것이냐, 최고 명장면과 명대사는 또 뭐냐 신나게 떠들었었지. 그러다가 그 친구가 자기가 <슬램덩크>를 진짜로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면서 분위기를 잡더라고.”
은호는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나름 용기를 내어 질문을 했는데 엉뚱한 선문답이라니, 게다가 반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은호는 서진의 반응이 불쾌하지 않았다.
“진짜 이유가 뭐였는데요?”
“한국어로 된 <슬램덩크>만 보면, 거기 나오는 애들이 서로 엄청나게 다 친해 보이잖아? 하긴 그렇게 매일같이 미친 듯이 훈련하고, 시합하고 하다 보면 당연히 가까워질 것 같지. 근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네? 안경 선배랑 채치수도 마지막까지 거리감이 있는 사이로 남고. 그나마 얘네들은 꽤 친하다고 할 만한 관계가 송태섭이랑 강백호 정도? 아, 물론 백호랑 호열이 무리들이랑은 엄청 친한 거 맞고.”
“일본어판으로 보면 그게 다 보여요?”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대. 일본에서는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대부분 성으로 부르지, 별명도 특별한 사이에서만 쓴다고 보면 돼.”
“그런데 그게 왜 제일 좋아하는 이유예요?”
“그러니까 말이야, 내 친구는 그게 좋았던 거지. 농구에 모든 걸 쏟는 것처럼 보이는 그 아이들한테, 사실 농구는 전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분이었다는 게.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겠지만 어쨌거나, 각자에게 같이 운동을 하는 동료들보다 더 친하고 소중한 관계들이 있고, 농구보다 더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거.”
은호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매년 2회씩은 <슬램덩크>를 정주행해왔던 은호였기에, 진지하게 일본어를 공부해보고자 하는 의욕마저 샘솟았다. 그러다 문득 애초에 던졌던 물음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여기 이름은···”
“아, 그렇게 생각해도 별 상관은 없어. 보는 사람이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그만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