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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Sep 03. 2019

#5. 죄송이라는 말

2019.09.03.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자주 내뱉는 말 중에서 가장 절묘하다고 할까 웃기다고 할까, 매우 흥미롭다고 여기는 문장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분명 무엇무엇을 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모습이나 소리 따위가 흐릿함이 없이 똑똑하고 뚜렷하다.’는 뜻을 가진 정상에서 시작해 겸양인 듯 불안인 듯 둘 다인 듯 헷갈리는 ‘것 같’의 산허리를 지나, 지체 없이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는 형상을 한 반문과 조아림으로 이어지는, 마법 같은 이 한 마디. 어떻게 고작 스무 자 언저리만으로 자기 확신과 감정의 오르내림이 이다지도 잘 표현될 수 있을까? 그것도 류현진의 체인지업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큰 낙폭으로!


옅은 자괴감도 든다. 이토록 극적인 문장을 왜 나는 입에 달고 사는 것일까, 그것도 일터에서. 자애로운 선배님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새삼 샘솟는다. 새 삶을 살게 해주신 내게 샘 같은 그들…. 다행히 ‘죄송합니다’ 이후에 ‘지금 다시 확인해볼게요’로 반전을 꾀하는 스킬을 익힌 덕에 그럭저럭 밥을 벌고 있다. 차치하고, 저 문장에 대해 조금 더 고찰해보기로 한다.


고백하자면 난 저 말을 뱉으면서 단 한 번도 ‘분명’한 확신을 가진 적이 없다. 물론 저 말을 할 때마다 늘 내가 죄송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백이면 아흔아홉은 허걱하는 마음과 함께 나도 모르게 확신을 가장하고 있었다. 위기상황에 몰린 짐승이 기를 쓰고 자신의 몸집을 크게 보이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바람 한 번 불면 흔적도 없이 날아갈 거품을 칭칭, 풍향에 따라 내 심장도 쾌지나 칭칭, (범인은) (또) 나네.


반면, 오히려 확신에 찬 말을 꺼낼 때 사과를 먼저 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죄송한데 제가 주문할 차례인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전화를 잘못 거셨어요.”, “죄송해서 어쩌죠? 저희가 요청드린 건 그게 아닌 것 같아요.” 등등.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죄송’의 뜻을 찾아보니 ‘죄스러울 정도로 황송하다.’가 나온다. ‘황송’은 ‘분에 넘쳐 고맙고도 송구하다.’이다. 다시 ‘송구’는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란다. 이어보면 ‘죄송’은 곧 ‘죄스러울 정도로 분에 넘쳐 고맙고도 두려워서 마음이 거북스럽다.’가 된다.


처음엔 대체 이게 뭔가 싶었는데 계속 들여다보니 썩 그럴듯하다. 어쨌든 타인에게 어떤 감정 혹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은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하고 어려운 일일 테니까. 어렴풋한 믿음이 아닌 내 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신념을 드러낼 때 더더욱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맞는 일일 테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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