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오노미치 여행 Day1-2
센코지로 향하는 길.
멀리서 신비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청아한 소리에 홀린 듯 따라 걷자, 햇빛에 반짝이는 수많은 후우링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로 만든 종 아래로 소원이 적힌 종이가 매달려 있었다. 촉수가 하나뿐인 해파리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종이가 뱅글뱅글 돌며, 은하수 같은 소리를 냈다. 잘게 진동하는 몸짓이 마치 내 주인의 소원을 이뤄달라는 듯 간절해 보였다.
“일 잘하네…”
미술관에 가기 위해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아찔한 벼랑 너머 전망에 잠시 멈춰 서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줌을 당겼다가 풀었다 다각도로 풍경을 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타이완 진?(대만인?)”
60대로 보이는 일본인 아저씨였다.
“칸코쿠진데스(한국인이에요).”
“아, 칸코쿠진데스까!”
내 한마디에 아저씨의 눈빛이 변했다. 갑자기 말이 빨라지더니, 전광석화 같은 일본어 폭격이 시작됐다.
…나는 히라가나도 못 읽는데.
처참한 속사정을 알지 못한 채 오노미치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했다. 어떻게 아냐면 반복되는 ‘키레이’ 단어에서 유추했다.
어디 가냐고 묻기에 미술관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자신을 오노미치 홍보대사라 소개하며 명함을 보여주었다. 그 뒷 면의 우대권이 있으면 미술관 입장이 무료라고. 맥락상 나한테 건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귀중한 우대권은 도로 지갑에 들어갔다.
오후 3시 10분.
나는 미술관에 있어야 했다. 그게 오늘 내 일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외딴 전망대에 아저씨와 단둘이 서 있다.
여행객은 모르는 멋진 전망대가 있다며 따라오라 했다. 그 전망대가 어딘지 나도 알고 있었다. 동선이 꼬여서 제외한 곳이었다.
아저씨는 지역 홍보대사로서 뭔가 보여주겠다는 신념에 가득 차 보였다. 짧은 시간, 내면은 찬반 토론을 벌였다. 곧 일몰이니 일정대로 움직여야 해, 아저씨의 신념이 오타쿠의 마음을 움직여... 시간을 확인하고 아저씨와 동행했다.
다만 내가 놓친 게 하나 있었다. 아저씨는 단 한 번도 조각 영어나 번역기를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전망대는 오래전 성이었다고 한다. 남아 있던 성의 일부를 개조해서 전망대로 쓰고 있다고. 아저씨는 팔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며 장황한 열변을 했다.
지휘봉을 휘두르듯 팔을 움직이며 설명에 심취해 있었다. 지역에 가진 깊은 애정이 언어 너머로도 느껴졌다. 하지만, 듣는 이의 처참한 일본어 이해 능력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키레이’ 밖에 못 알아들었고 땀은 비 오듯 흘렀다. 아저씨가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코를 푹 찌르는 암내가, 이제 그의 것인지 내 것인지 분간도 안 됐다. 지금 당장 샤워가 필요했다. 혼자만의 시간도...
“아쉽지만 저는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번역기를 보여줬다. 아저씨는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독백 극을 이어갔다. 이젠 자신이 잘 아는 라멘집에 가자며 언덕 아래로 이끌었다. 고양이 언덕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말을 멍하니 듣다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나도 말할 수 있었지.‘
아저씨는 내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동안 그를 배려해 번역기로만 소통했기 때문일까. 고장 난 한국어 AI 같은 내 답변에 그제야 일본어 폭격을 멈췄다. 아니, 멈춘 듯 보였다.
아저씨는 회복탄력성이 뛰어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너무 오래 들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기가 쭉 빨려, 우리 집 베란다에 한 달 넘게 방치된 시든 무처럼 축 늘어졌다. 끝난 줄 알았던 아저씨의 라멘 얘기가 이어졌다. 결국, 과부하 된 뇌가 고장 났다.
“…전 집에 가면 신라면부터 끓여 먹을 거예요. 김치 쫙 찢어서 같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아세요? 고춧가루랑 고추장 팍팍 들어간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요. 떡볶이도 너무 먹고 싶다…”
“(일본어일본어)”
“하지만 또 간장 베이스로 먹어야겠죠. 할 수 있어… 아니, 싫어.“
“(일본어)“
“아, 이제 다 내려왔네요. 저는 역 쪽으로 갈 건데, 아저씨는요?”
“(일본어일본어)”
“만나서 반가웠어요. 건강히 지내세요.”
“(일본어)”
“바이바이.”
“Bye Bye.”
마지막으로 아저씨는 번역기에 작별 인사를 남겼다.
“일본어 좀 배워오세요.”
…사요나라.
그날, 나는 배운 단어 하나 없이 일본어 듣기 평가 60분을 마쳤다.
오노미치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가장 오래 기억나는 건 아저씨의 암내였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수다쟁이 어른이 될까.
…그땐, 냄새는 안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