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오노미치 여행 Day1-1
오노미치는 케이블카가 있는 작은 항구 마을이다. 해가 지면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10시 10분.
막 오노미치 역에 도착한 시간.
어두운 거리를 두리번 거리며 문 닫힌 상점가를 홀로 걷고 있다. 역 주변에선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였지만, 숙소로 향할수록 기척이 사라졌다. 캐리어 끄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울렸다.
분명 사진 속 오노미치는 바다와 언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소도시였는데, 밤이 되자 조용하기만 하다. 깜깜한 골목길에서 공포의 실체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두려워, 공포영화 여주인공처럼 호텔까지 전력 질주했다.
...날 쫒는 건 내 그림자뿐이었다.
조도가 낮게 켜진 호텔 로비에 남자 직원 홀로 근무 중이었다. 심드렁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유일한 구원자를 만난 것 같았다.
오늘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모든 체력이 소진되었다. 어서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 구원자 같던 그는 이제 로비의 문지기처럼, 내 숙박을 가로막고 있었다.
남자의 심각한 표정.
뭐가 꼬였는지, 어떻게 처리되는 건지… 도무지 끝나지 않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내 허리가 말했다.
끊어질게.
고조되는 불안감이 통증마저 집어삼켰다. 다시 길바닥 신세가 될 순 없었다.
“…제 예약이 잘못된 걸까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
문제없다면서 왜 이리 장황한 건지. 그의 과도한 친절에 정신이 떠날 채비를 하는데.
다시 심드렁한 얼굴로 돌아온 직원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상층 오션뷰 방을 내어주었다.
역시… 친절해.
‘513’이 인쇄된 아크릴 열쇠고리. 구둣주걱 만한 이건 내 호텔방 키다. 이 호텔은 카드키가 아닌 열쇠를 사용하는 아날로그 감성을 추구했다. 거추장스러워서 여행 중에는 떼고 다니기로 했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야지.
몸은 침대로 고꾸라지길 원했지만, 씻고 자야 한다는 여행 철칙을 지키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삑삑.
새벽 5시 40분.
알람 소리에 깼다.
암막 커튼을 활짝 걷었다. 밤의 오노미치는 사라지고 새벽 공기 가득한 오션뷰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래 이거지…
오전 11시, 숙소를 나왔다.
편의점에서 돈가스 샌드위치랑 블랙커피를 계산했다. 야외 파라솔 벤치에 앉았다. 그늘 아래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노미치 상점가를 감상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는 주민, 상자를 나르는 상인,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 중인 인력거꾼, 두리번거리며 걷는 관광객들.
땡땡땡땡.
철도 건널목 경고음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 철길 위를 질주하는 기차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도 어제 저걸 타고 왔었지.’
파라솔 너머 파란 하늘이 빛났다.
오늘 주요 목적지는 전망대와 센코지 사찰.
오노미치 마을은 바다와 산 사이 좁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과 계단이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세토 내해에 접해 있어 바다 경치가 무척 멋진 곳이다. 날씨까지 좋으니 전망대 전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됐다.
케이블카 매표소에 줄을 섰다.
지갑을 찾는데…
맙소사 지갑이 없다.
지갑의 행방은 호텔 객실. 최단 경로로 숙소에 돌아갔다. 돌아온 김에 이번엔 반대편 길로 가보기로 했다.
케이블카 매표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젯밤 걸어왔던 길이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게 걷는 마을이 어제와 전혀 다른 곳처럼 보였다. 대낮의 오노미치는 물감으로 그려낸 엽서 속 한 장면 같았다.
한가롭게 낚시하는 사람들,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이동하는 주민들, 바다를 오가는 작고 큰 배들, 아기자기한 상점들, 골목 사이 기찻길 풍경을 구경하며 케이블카 매표소로 향했다.
편도 티켓을 구매했다.
돌아갈 땐, 언덕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고양이 언덕’의 귀여운 풍경을 즐길 생각이었다. 지갑은 놓고 왔지만, 츄르는 챙겨 온 나의 치밀함.
만국 공통인지 케이블카엔 사람을 꽉꽉 채워서 출발시켰다. 퇴근길 여의도 만차 버스에 탄 듯한 답답함. 케이블카 창문 너머로 관광객을 가득 채워 넣었던 장본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게 활짝 웃으며. 그녀의 마력에 손이 따라 움직였다.
케이블카에서 본 풍경은 예뻤지만, 여유 있게 감상할 틈도 없이 도착해 버렸다.
아쉬움도 잠시, 전망대에 오르자 환상적인 파노라마 뷰가 펼쳐졌다.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평지 위에 빼곡했고, 섬과 섬 사이를 가르는 바다가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파란 하늘이 속을 뻥 뚫어주는 듯했다.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혼자 찍기 어려워 근처 한국인에게 부탁했다.
…사진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눈에 가득 담기로 했다.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망대 한편, 일본인 여자 친구 둘이 항공샷을 주고받고 있었다.
“야바이~”
유튜브에서 일본 젊은 층이 자주 쓰던 익숙한 단어였다.
그때, 친구를 정성껏 찍어주던 스마트폰 액정 각도가 정확히 내 시야에 꽂혔다. 시력 1.2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였다.
그녀는 프 로 였 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런 기회는 다신 오지 않는다고. 그들의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저기… 스미마셍… 샤신, 오네가이시마스…?”
한국어, 조각 일본어,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으로 부탁했다.
영혼의 단짝처럼 보이던 두 사람은 완벽한 팀이었다. 한 명이 사진을 찍고, 한 명이 옆에서 디렉팅을 해줬다.
명당자리는 이미 누가 촬영 중이었다. 애매한 곳에서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가 다급하게 손짓하며 외쳤다.
“여기, 여기! 여기서!”
분명 일본어인데 단박에 이해했다. 그녀의 텐션에 맞춰 나는 박수갈채로 응답했다. 그녀는 혼신을 담아 사진을 찍었다.
”카와이~“
바위처럼 빳빳하게 굳은 피사체의 표정도 사르르 녹이는, 진정한 프로...
그녀가 귀여운 덧니를 드러내며 결과물을 보여줬다. 역대급 인생샷을 획득했다.
“대박! 혼~~또니 다이스키데스!“
(당신이 진짜 내 구원자였어)
“대~박~~!”
그녀들은 아는 한국어가 나왔는지 따라 하며 꺄르르 웃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내 친구로 임명합니다)
“캄사하무니다~”
우린 감사합니다를 합창하고 꺄르르 꺄르르 웃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찍어준 사진은 내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남아 있다. 인생샷 남겨줘서 고마웠어 도모다찌.
그녀들이 떠나고 카톡을 열었다.
[나 : 비밀인데…(칼답을 부르는 마법의 단어)]
[친구 : 웅웅]
[나 : 일본인 친구들이 나 카와이 하대]
[친구 : 내 일본인 찐친들은 굴러가는 축구공에도 카와이라고 함^^]
[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