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지마에선 절대 사슴에게 등을 보이지 마...

여자 혼자 미야지마 여행, 당일치기 1

by 레이다


일본 관광 책자를 보면 자주 등장하는 빨간 도리이. 물 위에 떠 있는 도리이를 본 적이 있다면 거기가 바로 미야지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된 이쓰쿠시마 신사의 도리이



히로시마에 도착한 지 3일 차.

3일 내내 우중충한 하늘만 보고 있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미야지마의 아름다운 풍경을 촬영하고 싶은데 비가 그칠 줄 모른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낮부터 비가 그친다고 하니 기대라도 해봐야지, 싶던 순간 트램이 도착했다.




문제의 티켓



#인류애 자판기


미야지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페리를 타야 한다. 매표소 자판기에서 입도세 결제를 했다. 자판기가 뱉어낸 티켓 한 장을 주워 선착장 입구로 향했다. 검표원에게 티켓을 내밀었다.

그때.


젊은 일본 여자가 헉헉대며 뛰어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일본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서 백인 아줌마가 쫓아와 손에 쥔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티켓.


자판기에서 티켓이 시간차를 두고 두 장 나왔는데, 내가 한 장만 들고 온 거다. 어제도 라멘집에서 자판기에 버리고 온 주인 잃은 티켓을 대만 관광객이 주워다 줬었다.


인류애가 느껴지는 순간들이다.​




문득 예전 도쿄 여행 때 일이 떠올랐다.

여행 마지막 날 나와 내 친구는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역 계단 앞에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있었는데, 전날 돈키호테 쇼핑을 마치고 양껏 압축시켜 담은 터라 캐리어의 무게가 15킬로를 넘었다. 이 무서운 캐리어를 들고 올라갈 생각에 도저히 발이 떼지지 않았다.


마침, 역무원 아저씨들이 나타나 우리 짐을 계단 위까지 들어주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스미마셍...”


동시에 터져 나온 나와 친구의 인사는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고마움의 강도가 클수록 스미마셍이라 인사한다고.​




나는 눈앞의 일본 여자와 국적 모를 백인 아줌마에게 그때와 같은 감정이 일었다.


눈썹은 팔자로 내리고 잔뜩 똥 마려운 표정으로 일본 여자에게 “스미마셍...” 백인 아줌마에게 웃으며 “땡큐 쏘 마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린 하하하 웃고 각자 갈 길 갔다.



만조가 되면 신성력 만퍼가 되는 도리이. 물 위로 둥둥 뜬 듯 보인다.



#무거운 각오


만조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제한 시간 걸린 포토타임이 왔다. 오늘 날 잡은 건지 하늘도 맑게 개었다. 도리이와 함께 사진을 찍고자 내 어깨를 희생하며 무거운 삼각대도 챙겨 왔다.


초경량무새인 내가 삼각대를 챙겼다는 건 오늘 인생샷 건질 각오했다는 거다. 삼각대를 세워두고 블루투스 리모컨으로 열심히 찍었다.


이날 300장 정도 찍은 것 같은데 3장 건졌다.

묘하게 내 얼굴이 가려질수록 사진이 근사했다.



내 뒤에 사람 천 명 있음.



#지갑을 여는 주문


근처에 젊은 한국인 관광객 무리가 있었다. 그중 홍일점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관리한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 인생샷은 다 이 사람이 찍어줬을 거라 믿고 싶었다. 그녀는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포즈와 표정을 요구했다.


“좀 더 웃으세요~.”

“아~ 예뻐요.”


립서비스도 추가하는데, 지갑을 열어야 할 것 같았다.



쓴 입맛을 다시며 떠나는 사스미



#갖고 있는 거 다 내놔


도리이 근처 벤치에 앉아 미야지마의 풍경과 관광객들을 구경했다. 바닷물 위에 도리이가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나룻배 체험도 하고 있었다. 현실감 없는 풍경에 기분이 멍해지는데...


팔에 물컹한 무언가가 닿았다.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리니 육중한 사슴 대가리가 보였다. 놈이 주둥이를 내 에코백에 처박고 있었다. 녀석과 한바탕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녀석의 입에 물린 책자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사슴에게 먹을 걸 주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놈은 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물색했고, 아이스크림을 맛깔나게 핥아먹던 남자로 타깃을 변경했다.

남자는 사슴이 다가오자 등을 보이며 도망쳤다. 느긋하게 뛰던 남자는 사슴에게 터치 당하자, 감전된 사람처럼 펄쩍 뛰더니 쏜살같이 달아났다.


도리이 보러 왔다가 야생 사슴의 양아치력을 직관할 수 있었다.




물이 빠지는 간조 시간에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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