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구라시키 여행 Day2-1
아침 일찍 기상해서 여유 있게 씻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이제 옷만 갈아입으면 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윽, 냄새.”
어제 야키니쿠를 먹으러 갈 때 입었던 긴 바지가 역한 냄새를 잔뜩 머금었다. 함께 입었던 체크셔츠와 반팔티는 수증기 가득한 욕실에 널어뒀더니 냄새가 싹 빠졌다. 바지도 함께 널어 둔다는 걸 깜빡했다.
‘긴바지 하나만 가져왔는데…’
캐리어에서 다른 바지를 찾았다. 하나는 잠옷으로 챙긴 푸마 운동복 반바지, 나머지 하나는 외출용 짧은 반바지. 둘 중에서 선택해야 했다. 상의로 블라우스를 입은 터라, 면 반바지를 택했다.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체크하다, 뒤태를 확인하는데.
“이게 뭐야?”
양쪽 허벅지에 새카만 피멍이 들어 있다. 양손으로 가려야 겨우 가려지는 크고 넓은 멍자국.
언제 생긴 거지? 분명 필름 끊긴 적도 없다. 경로를 알 수 없는 멍자국. 훤히 드러나서 짧은 반바지를 입을 수 없었다. 시선을 침대로 돌렸다. 침대 위에 널브러진 푸마 반바지와 냄새나는 긴바지.
피할 수 없는 양자택일의 순간이 찾아왔다.
동네 슈퍼 가는 차림으로 여행하기
VS 냄새나는 긴바지 입고 여행하기
…냄새를 빼서 입자.
내가 보유한 아이템과 호텔 방을 쥐 잡듯 뒤졌다. 옷장에서 분사형 에어프레쉬를 발견했다. 소독하듯 꼼꼼히 뿌렸다.
안 잡힌다...
향이 있는 바디 미스트를 뿌려 보았다. 나아진 듯 하지만 그 특유의 역한 냄새가 함께 올라온다. 욕조에 샤워 커튼을 치고, 바지를 걸었다. 샤워기로 뜨거운 물을 받아 수증기를 만들었다.
냄새 빠질 때까지 딱 30분만 기다려 보자…
30분 뒤, 냄새를 확인했지만 그대로다.
그래, 30분만 더 해보자. 아직 시간 여유 있으니까…
1시간을 채우고 다시 확인했지만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이제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 최후까지 보류했던 향수를 꺼내 들었다. 끔찍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냄새는 냄새로 덮는다.
호텔을 나와 버스 정거장까지 열심히 달렸다. 바지 냄새 빼느라 1시간 반을 낭비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고, 2분가량 여유 시간이 남아 있었다. 구글 지도를 확인하며 가쁜 숨을 골랐다. 순조로웠다.
11시 17분, 버스 도착시간이다.
달려오던 버스가 정차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갔다. 시선이 떠나가는 버스 뒤꽁무니를 허망하게 쫒았다. 버스가 정차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나는 정확히 도로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에 통행 차량이 없어 인식하지 못했다. 일본은 차선이 반대였다.
이미 버스 시간을 수차례 확인했지만, 믿을 수 없어 정거장에 붙은 시간표를 노려봤다. 다음 버스는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있다.
“……”
뒤늦게 흘러내리는 땀. 뭉게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푸른 하늘. 정수리를 뜨겁게 달구는 존재감 확실한 태양.
…날씨는 좋네.
사진 잘 나오겠어.
발길을 돌려 구라시키 미관지구로 향했다. 어제 비 내리는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담았으니, 오늘은 남은 한 시간 동안 맑은 날의 미관지구를 담아봐야겠다. 신호등을 건너 미관지구에 닿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찰칵.
자연광이 풍부해서 찍는 사진마다 맑고 깨끗하게 나왔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에도 시대 분위기의 운하가 있는 여행지. 나는 특히 이 운하 분위기가 좋았다. 구라시키에 머무르는 3일 동안 매일 운하를 산책했다. 전통 모자를 쓰고 나룻배를 타는 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나도 나룻배 위에서 여유를 즐기고 싶었으나, 예약이 만만치 않았다.
운하 주변에는 버드나무 가로수가 일정 거리를 두고 심겨 있었다. 산들바람에 날리는 잎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금세 다음 버스 배차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 주요 목적지는 와슈잔 하이랜드다.
가장 빠른 교통수단은 버스. 한 번 갈아타야 했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버스 출입문 위로 모니터가 걸려 있었다. 성인, 어린이 아이콘과 요금으로 추정되는 숫자들. 꾸준히 갱신되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드디어 환승할 정거장에 도착했다. 일본 버스는 우리나라와 달리 앞 문으로 하차하고, 내릴 때 요금을 지불한다. 45분 동안 엉덩이 배기게 앉아 있었다. 빨리 내리고 싶었다. 교통카드 단말기에 아이폰을 태그 했다.
짧은 삑 소리 후, 잔액 부족 알림이 떴다.
교통카드에 750엔이 남아 있었고,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안심했는데... 황급히 부족한 요금을 애플페이로 충전했다. 기사님께 스미마셍을 돼 내고 버스에서 내렸다.
애플페이의 쓸모를 격하게 체험한 순간이었다. 국내에서 써본 적도 없던 애플페이가 일본 대중교통 이용할 땐 유용하게 쓰였다. 1엔 단위로 충전할 수 있어, 잔액 생길 걱정도 없었다.
앞서 버스 모니터에 표시되던 숫자는 구간마다 추가되는 요금이었다. 교통카드의 경우 자동으로 지불되지만, 현금을 이용하는 경우 스스로 구간 요금을 계산해서 지불해야 한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에서 와슈잔 하이랜드까지 버스 편도 요금, 총 860엔. 참고로 고속버스가 아닌, 일반 시내버스였다. 한화로 약 8,000원 정도 되는 버스 요금을 내고 나니, 우리나라 버스 요금 1,500원이 새삼 감사했다. 내가 누리던 게 복지였구나.
버스에서 내린 나는, 이제 고난은 끝이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이번 여행 중 가장 섬뜩한 소리를 듣게 될 줄은 예상도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