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시키에서 집으로 : 죽지 마 살구야

여자 혼자 구라시키 여행 Day3

by 레이다


오전 5시


커튼을 활짝 걷었다.

창문 너머 일출에 밝아오는 구라시키 도심 전경이 펼쳐졌다. 정면에는 규모가 제법 큰 유치원이, 좌측에는 자연사 박물관이 보였다. 멀리 산등성이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매일 도시의 일출을 보았다. 낯선 도시의 새벽 공기 속에서, 피곤한 얼굴이지만 단정한 차림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 수 없는 안정감과 활력을 줬다. 그 부지런한 모습에, 나도 남은 여행을 힘차게 시작해야겠다는 활기가 돌았다.



정면, 유치원
좌측, 자연사 박물관과 구라시키 미관지구



오전 6시


가벼운 차림으로 구라시키 미관지구 산책을 나왔다. 맑은 하늘이 오묘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상점들은 영업 전이었고, 관광객이 찾지 않는 거리는 조용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를 배경으로 조깅하는 여자, 수로에서 체조하는 남자, 산책하는 노인,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직장인이 보였다. 온전히 주민들의 시간이었다.



고요한 구라시키 미관지구 상점가



구라시키 전망대로 알려진 곳을 찾아갔다. 긴긴 계단을 올라가면 사찰과 좁은 골목이 나왔다. 계단 위에서 미관지구를 조망하기엔 시야가 좁았다. 골목을 따라 반대 반향으로 이동하니, 시야가 넓게 트인 도심을 조망할 수 있었다. 언덕 높이라 고도가 높지 않았다.


되려 내가 묵은 숙소의 전망이 좋았다고, 뒤늦게 깨달았다. 도시의 전망을 애정하는 나로서는 구라시키를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맑은 하늘, 맑은 공기



오전 9시


내 캐리어 살구(살구색이라 살구라 지어줬다)를 끌고 구라시키역으로 향했다. 후쿠야마로 이동해 공항 리무진을 타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만큼은 날씨가 맑았다.


이미 숙소에서 간단하게 푸딩과 야끼소바빵을 먹고 나온 채였지만, 맥도날드 앞을 지나자 감자튀김의 유혹을 참을 수 없었다. 공항 리무진을 타고 가면서 먹으려고 감자튀김 중간 사이즈를 주문했다. 넉넉함을 넘어 빽빽하게 감자튀김을 퍼주는 후쿠야마 인심.


리무진 대기장소에 앉아 느긋하게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다. 리무진 도착까지 아직 5분가량 남은 시간.


옆에 부녀로 보이는 성인 남녀가 섰다. 백발에 허리가 굽은 아버지와 중년의 딸. 정거장에 세워진 시간표를 확인한 그들은 쇼핑백에서 오니기리를 꺼내 들었다. 흰쌀로 덮인 큼직한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벤치에 자리도 많은데 왜 서서 먹을까 의문이 들던 순간, 리무진이 들어왔다.


버스를 탑승하려 일어선 내 옆에서 부녀는 주먹밥 식사 속도를 높였다. 체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부지런히 해치웠다. 쓰레기를 들고 있던 쇼핑백에 넣고 리무진에 올라탔다. 그제야 어떤 생각에 미쳤다.


설마…

‘리무진에 음식 가지고 타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우리나라 고속버스만 생각했나 보다. 고속버스는 휴게소 델리만쥬랑 호두과자 사 먹으려고 타는 건데…


밀봉할 봉지도 없고, 주변에 쓰레기통도 없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앞서 부녀의 염려스러운 식사 속도로 감자튀김을 해치웠다. 미션 클리어 후, 체할 것 같은 속을 메론소다로 뚫어줬다. 전날 마트에서 사 온 환타 메론소다는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공항 출국 전, 마지막 한 모금까지 싹 비우고 작별했다.



리무진 요금 지불 방법을 묻자 건네준 것.



마지막까지 지켜낸 것


드디어 한국,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던 중 살구의 손잡이가 두 동강 나버렸다. 안 그래도 손잡이 고무가 끈적끈적하니 삭은 것 같아 걱정스러웠는데, 이별의 복선이었을까. 마지막 남은 반대쪽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자 국수 면 끊기듯 똑 끊어졌다.


“아, 안돼…”

죽지 마 살구야.


결국 나는 17kg의 살구를 두 손으로 질질 끌어 계단을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두 동강 난 살구의 손잡이처럼 내 허리도 끊어질 줄 알았으나, 의외로 잘 버텨 주었다.


허리는 지켜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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