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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Oct 12. 2018

나를 사랑하는 일이, 당신을 사랑하는 일 같다

영화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가끔, 아니 자주, 나를 사랑하는 일이 힘들었다. 요행같은 행복은 언제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아 나는 행복해서 불행했다. 안정감이 곧 불안함이었다.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웠고 결국 자기검열과 지나친 자신감을 내보이며 버텼다. 그러다 지치면 티나지 않게 숨었고, 외로워 견딜 수 없으면 다시 당신들에 손을 내밀었다. 사랑 받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주는 일에만 익숙해졌다. 주는 사랑이 좋은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다 받는 사랑을 피하게 됐다. 의심이 클수록 상처받는 일이 무서워졌다. 그러고도 인생은 잘만 살아져서, 약간 망가진 채로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이미 꽤 옛날 영화가 된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우연히 보게 됐다. 영화의 끝 무렵 황정민의 대사를 듣고 문득 오늘 나의 하루에 빛나는 순간이 있었는지 되짚다가, 언젠가 지나쳐 온 문장에 마음이 닿았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고,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 아니, 하루를 다 쓰지 않아도 우린 더 많은 걸 망칠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고, 오늘 하루는 수많은 작은 세계들이 겹쳐 만들어진다. 나의 세계를 폐허로 만드는 데에는 그 세계를 짓는 것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주어진 행복도 감당할 줄 몰라서 언제든, 무엇이든 망칠 준비가 되어 있는 한심한 사람이니까.


영화 속 형사인 황정민은 유괴범으로 몰린 서영희에게 말한다. "오늘 너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너 내가 살려준다." 나는 정말, 황정민이 꼭 나한테 그 말을 하는 것만 같아 순간 오늘 나를 지나쳐간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한 마디에 영화의, 내 삶의 모든 길 모퉁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는 오래된 관성으로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내가 당신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이 나의 일부분이라는 걸 잊었다. 전부 잊고,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존재가 나라는 것도 잊는다. 우리는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일로써 당신의 인생에서 빠져나올 때, 나는 당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나를 사랑하는 당신들을 울게 하는 방법은, 내가 나를 포기하는 거니까.


우리는 가끔 당신을 너무도 사랑해서 나를 잊고, 행복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기꺼이 불행해지곤 한다. 영화 속 모든 오해가 발생하는 지점이자 모든 문제를 풀어내는 해답이기도 한, 그런 일. 찢어지게 가난한 부부, 서영희가 남편 임창정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본인을 조금만 더 사랑하면 됐다. 빚은 떠안은 채 서로 몰래 행상을 하며 푼돈을 벌어 근근히 먹고 사는 두 사람에 아이가 생겼다. 사랑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형편, 그 무서운 선택의 순간들에서 둘은 함께 하지 못한다. 다만 너로 인해 행복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살아갈 이유가 있다는 한 마디가 나를 살리고, 당신을 살리고, 우리를 살린다. 내가 나를 사랑해도 된다는 허락이자 위로 같아서. 본인의 안위보다 나의 만족으로 기뻐할 사람을 위해.


허술하게만 보였던 영화의 장면들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흘렀다. 우리는 너무 지질하고, 그래서인지 인생은 나에게 유독 가혹하다. 나를 사랑하기가, 좋아해주기가 유난히 힘들다. 다만 그렇게 애를 쓰는 순간들에 생명은 더 크게 타오른다. 영화는 삶과 죽음의 문턱에 유난히 자주 다가가는데 그 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간절하게 만들고, 영화는 이어 말한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니체. 당신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이 끔찍한 생을 함께 살아내겠다는 말 같아서 나는 울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들 곁이라면 영원히 살 수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동안 잊고 있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미안해 또 콧등이 시큰했다.


we don't have forever.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당신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시름과 상실에 빠지기도 하고, 한동안 매일매일을 잃으며 살기도 한다. 다만 그런 시간이 삶을 더 빛나게 만든다. 유한한 시간이 나를 한껏 인간적이게 한다. 무한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나는 오늘이 슬픈 대신 치열하고, 또 간절해진다. 단 하루 안에 우리는 서로를 잃을 수 있으나, 단 한 순간이 주어져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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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언리미티드에디션 10 참가 예정입니다.

해당 글이 수록된 위로의 예술을 담은 책 <망가진 대로 괜찮잖아요>가 텀블벅에서 펀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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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gram. @jaen1126 / @warmgrayand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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