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뒹굴뒹굴 놀다가 이제야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20230211 (육아휴직 195일째)
부산 좋소기업에서 육아휴직을?
노예근성에 쫄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디자인 회사에서 일을 한다’고 하면 열악한 근무 환경,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회사, 무책임한 사수, 좋소기업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어린 디자이너들이 삶의 터전이던 부산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아예 다른 직종으로 이직을 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갑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막내급 디자이너, 중간관리자급 디자이너를 구해달라, 좋은 후배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연락을 자주 듣게 되는 것 보면 여전히 부산은 디자인 기업의 불모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옳은 방향’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기업들도 있는 반면, 여전히 ‘좋소기업’식의 경영을 하고 계신 디자인 기업 오너들이 많습니다. 가족들이 경영하는 가‘족 같은’ 기업도 많고, 소규모 디자인스튜디오에서는 염전노예 부리듯 직원들을 다루는 사례도 많이 보고 겪어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규 디자인기업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 기업들에서는 ‘육아휴직’은 곧 퇴사와 동의어입니다. 제가 다니던 모 디자인 회사에서는 갓 입사한 신규직원이 곧 결혼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권고사직 시키기도 했고, 육아휴직을 하고 싶다던 팀장급 디자이너와는 욕설이 오가며 다투다 자기 화를 못 이겨 스스로 사직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팀장에게는 퇴사를 종용했던 사례를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네, 2023년 대한민국의 제2도시 부산에서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 곳에서 15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저에게도 노예근성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아니, 아주 심하게 쩔어 있었죠.
저는 제 인생에서 ‘육아휴직’이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15년 넘게 나의 급여에서 꼬박꼬박 떼어냈던 4대 보험 중 ‘고용보험‘이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죠. 그저 나라에서 떼어먹는 우수리, 세금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노예근성에 쩔어 있던 제가 뜻밖에도 7개월째 육아휴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생에
첫 육아휴직이라니!
디자인회사에서 기획자로서 10년 넘게 일하다가 아이들의 육아를 핑계로 탄력근무가 가능한 스타트업기업으로 옮기고 IT분야 및 스마트관광 분야의 서비스 기획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이 서비스기획이지 주 업무는 제안서와 프레젠테이션 작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초기창업패키지를 비롯한 인력지원사업 등의 정부지원사업, 사무공간 임대사업과 관련한 업무들은 스타트업의 특성상 데스벨리에 도달하기 전 생존에 꼭 필요한 사업이었기에 이쪽 일에 집중해서 다양한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하던 브랜딩이나 디자인 기획과는 다른 행정적인 업무가 많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나름의 메리트도 있었습니다. 스타트업이라 높은 연봉은 감당하지 못해 시간이 자유로운 탄력근무를 허락했던 것. 그리고 회사에서 겸업에 대해 많이 이해해 주셔서 근무하던 중에 회사업무와는 별개로 사회적기업육성사업에 참여해 법인을 설립해 소규모 브랜딩을 만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쏠쏠하게 회사를 다니던 중 개인적으로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6년 만에 둘째 아이가 생겼습니다.
첫째 아이가 여섯 살 때였습니다. 혼자 놀기에 한계를 느끼던 첫째 아이가 동생을 만들어 달라고 밤마다 눈물바다를 만들었습니다. 첫째를 키우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터라 둘째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40대인 제 나이에 대한 부담도 컸습니다. 내가 40대 중후반에도 아이들을 잘 키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아내 역시 적지 않은 30대 후반의 나이였기에 임신과 출산은 쉽게 넘길만한 숙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혼자서 커 갈 아이의 행복’과 ‘둘이서 함께 커 갈 아이들’의 행복을 비교해 볼 때 어떤 것이 더 클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 2022년 3월 둘째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을 준비하며 다니던 직장에서 이미 육아휴직을 받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아이를 출산하고 둘째 아이를 집중적으로 케어하다 보니 첫째 아이에 대한 케어가 많이 부족했었습니다. 첫째 아이는 일곱 살이 되었지만 둘째에 대한 질투가 생겨서 종종 기어 다니기도 하고,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어리광을 부리는 등 유아기로 퇴행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때 “당신도 육아휴직 내보는 게 어때요?”라는 아내의 말이 육아휴직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회사에 가서 당장 임원진을 만나 상의를 했습니다. 마침 회사는 초기 창업기업에서 데스벨리로 넘어가는 시점이어서 투자했던 사업들이 지지부진했기도 했고, B2G로 했던 사업들 역시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퇴사보다는 유능한 인재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회사도 솔깃했던 것 같습니다. 선뜻 저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 부부는 돈은 적게 벌어도 된다 그저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엄마아빠가 있는 저녁의 삶’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아휴직급여야 인터넷에 잘 나와있는 대로 두 사람 합해봐야 200만 원 조금 넘는 금액입니다. 어떻게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살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7개월째 육아휴직을 하고 있습니다. 네, 어떻게든 살아집니다.
회사의 노예에서
육아의 노예로
어떻게 6개월이 순삭 되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왔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첫째 아이는 올 3월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둘째 아이는 3월에 돌을 맞고, 지금은 여기저기 기어 다니며 온갖 것들을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의 수입은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행복은 두배로 커진 것 같습니다. 함께 걷는 산책길이 즐겁고,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행복하게 만듭니다. 개인적인 시간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함께 해서 즐거운 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아이들의 지난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매일 옆에서 지켜보는데도 ‘언제 이렇게 컸지?’ ‘예전에는 어땠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들었던 생각, 감정, 여러 가지 사건들을 기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기록은 내일의 역사를 만드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