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09
순간에 속지 말자
이사한 다음날은 대체 휴무일이었다. 내일부터 당장 출근할 일이 걱정이었지만 걸어서 출근에 도전해보고 싶다. 길도 찾고 시간도 재볼겸 쉬는 날 회사까지 걸어가 봤다. 차도가 아닌 길을 찾느라 좀 헤매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제대로 온다면 그보다는 훨씬 덜 걸릴 것 같다.
코스모스가 늘어선 만경강 변을 걷는 데 심취해 마을길로 들어설 때를 놓쳐버렸다. 무작정 길을 따라 걷는데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당황해서 우왕좌왕 하고 있었더니 밭에서 일하시던 아저씨가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요 앞에 군청 쪽으로 나가고 싶은데요. 아이고 여기는 농로라 못 걸어가 저기 수로 따라서 일단 길 쪽으로 빠져요. 나는 어디 예쁜 아가씨가 나 보러 이 아침부터 온 줄 알았네.
마을 중간중간 논밭이 펼쳐져 분위기도 좋고 마을 어르신은 편하게 말도 걸어주시고 바로 뒤편으로는 감격스럽게 아름다운 꽃길이 펼쳐져 있다.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 할머니들과 같이 밭일을 하고 농사를 배우면서 잔심부름도 하는 소소한 시골살이. 아이쿠야, 이거야 말로 귀농환상이다.
시간이 걸리는 일
잠깐 여행자로 만날 때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 친절했다. 운이 좋았거나 내가 특별히 도와주고 싶게 생겼거나, 눈치 빠르게 잘 처신했거나겠지. 그래서 겁 없이 그곳이 어디든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발리가 그랬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반한 여행지에 살고 싶어 한다. ‘살 때랑 여핼갈 때랑 다른다’ ‘한두 달 살아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이미 나는 발리에 두 달이나 있었지 않은가. 게다가 몇 년째 여행하듯 돌아다니며 살아오고 있으니 한두 달보다 더 긴 1년짜리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앞서 여러 번 밝혔듯 망.
시골살이에 대해서도 과한 자신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 나는 남들과 달리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마을에서 잘 지낼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도 갖지 말고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절대’라고 단언하지 말자.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세상살이에 ‘절대’라는 건 없다’는 거다. 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절대 어떻게 하지 않겠다, 이렇게 하겠다,라고 선언하지는 못하겠다.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살고 싶은 쪽으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오래 걸릴 거다. 사는 곳이 바뀌면 사람이 변해야 하는데 사람이 변하는 일이 그리 쉽던가. 나는 사는 방법도 바꾸었으니 적응해야 할 게 많다. 오랜만에 사무직 노동자가 되다 보니 윈도 8도 낯설다. 직장인으로서 동료들과 일 얘기를 하는 법도 기억을 되살려야 하고, 시골에 있는 소규모 회사의 특별한 정서도 이해해야 하고, 초보 독립인으로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먹고 치우는 살림법도 익혀야 한다. 그렇게 서서히 여기 완주에서, 시골살이에 적응해 나가야겠지.
자전거가 생겼다
집을 나서 처음 20분 정도는 차로 변을 걸어야 해서 공기도 나쁘고 위험했다. 나 말고도 도로 위 쓰레기를 줍는 어르신들도 종종 보이고 밝을 때라 사고가 날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마을길이 있는지 더 알아는 보겠지만. 충분히 걸어서 출근할 수 있겠다.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걸어 다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날이 추워지면 자전거 타는 건 힘들지. 자전거가 하나 있으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떡 하니 자전거가 생겼다. 사무실에 도착해 출근한 다른 분들과 얘기하다 자전거를 얻었다. 내가 본 것만 한 달 동안, 거슬러 직장 동료 ㅈ가 들어왔을 때부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타지 않은 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상사의 자전거다.
며칠 전 중고자전거라도 구해서 타고 다녀야겠다고 말했을 때 자기 자전거를 사겠냐 제안했고 오늘 얼마에 파실 거냐, 3만 원이면 되겠냐 했더니 밥이나 사라고 하며 고쳐서 쓰란다. 집들이 선물이라고 생각하라고.
네, 고맙습니다.
쌀집 아저씨 자전거 갖고 싶다
막상 받아서 보니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상태가 꽤 나쁘다. 3만 원 주고 샀으면 억울했을 뻔. 시골길을 달릴 때는 바퀴가 두툼한 옛날 쌀집아저씨 자전거 같은 게 좋은데 요즘은 생활자전거로도 유사 MTB만 만들어서 파니까 되려 옛날식 자전거가 비싸다고 한다.
이 자전거는 잘 닦인 길에서 속도 내기 좋게 바퀴가 얇은 하이브리드형이다. 이거 말고 돈을 좀 들여서라도 내가 원하는 자전거를 구해볼 걸 그랬나, 게다가 읍내 자전거포에서 손을 보니 2만 원이나 들었다. 뭐하나 명쾌하게 딱 떨어지는 게 없네, 집이든 자전거든. 그래도 신경 써 준 마음을 일단 고맙게 받자. 당장 내일부터 쓸 수 있게 오늘 자전거가 생긴 게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