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08
공과금 내기
드디어 이삿날이다. 우편함엔 9월 공과금 청구서들이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달 월세는 전세입자의 관리비와 도시가스를 제하고 얼마만 보내라고 미리 연락을 받았는데 수도요금 얘기는 없었다. 아싸, 집주인 아저씨가 실수했구만. 월세 미리 다 보냈는데 10월 월세에 빼고 보내야겠다.
관리비 청구서를 꼼꼼히 보니 거기에 수도요금이 있는데 수도세가 따로 나왔다. 원래 수도세는 따로 나온다고들 하던데 왜 그러지? 그동안은 한 번도 자세히 볼 생각도 궁금해할 생각도 안 했다. 이제부터는 다 내가 해야 한다. 그게 독립이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볼까 하다가 청구서를 다시 살폈다. 상수도 요금은 0이고 하수도 이용 요금만 있구나. 으흠, 물이 지하수라더니 아파트 관리비에서는 물값 만 내는 거로군. 그래도 내가 낼 건 아니니까 집주인에게 말해야겠다.
“수도요금 정산이 누락된 거 같습니다. 알려주시면 10월 월세에 반영하겠습니다”
입주자 카드 작성
TV 수신료도 부과되지 않도록 한전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 아파트는 관리사무소에 직접 신청해야 한다길래 택배 받는 법도 확인할 겸 찾아가봤다. TV가 진짜 없는지 확인하러 나오기도 한다던데, 집에 진짜 온다고 하면 어쩌지. TV는 없지만 모르는 사람이 집을 보는 것도 싫고 혼자 사는 게 알려지는 것도 싫다.
다행히 집에 직접 찾아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신청서만 쓰면 다음번 청구서에 반영된다고 한다. 대신 새로 이사 왔으니 입주자 카드를 쓰라고 했다. 사는 사람의 이름을 다 적으라는데 거짓말로라도 누굴 적어야 하는 건가 고민을 잠깐 했다. 그렇다 해도 적을 사람도 없다. 없는 남편을 만들어서 쓸 수는 없잖은가. 차라리 회사 이름과 연락처를 자세히 적어서 나에게 든든한 배경이 있다, 는 걸 드러내고 싶었는데… 아무도 모르겠지? 내 카드를 받아 든 남자 직원분이 혼자 사세요,라고 물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짧은 순간 또 고민하다가 ‘일단은요’라고 대답했는데 바로 후회했다.
남자 신발이랑 속옷을 걸어두어도 부족한 마당에 관리사무소에 공식적으로 여자 혼자 삽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나쁘지만 워낙 흉흉한 세상에 자기 한 몸 현명하게 잘 건사하는 것도 독립의 기본 조건일 텐데 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 마음속 긍정이가 나와서 열심히 나를 설득하기는 한다. 요즘 같이 개인정보에 민감한 세상에 누가 다 적겠어, 그냥 안 적었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일단이라고 말했으니 누구라도 나중에 오는 줄 알 거야. 아니면 주말에라도 북적북적 사람들 많이 드나들면 괜찮을 거야.
아파트라서 괜찮아
관리사무소에서는 혼자 사는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직원분은 택배는 여기에서 서명하고 찾아가면 된다고 설명해주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대답이 가장 현명했을까 뒷북 잡고 계속 생각하느라.
아파트 단지가 꽤 크고 저녁에도 사람들이 돌아다니기는 하지만 여기는 시골이다. 해 지고 나면 일곱 시만 돼도 캄캄하다. 늦은 밤에 다니는 일은 거의 없지만 차를 얻어 타고 오는 날에는 입구로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까지 올라오는 동안 내내 긴장된다. 엘리베이터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지만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때는 서둘러 몸을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잠근다.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오는 게 상책이다. 이러면서 시골집에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니 아마 무서워서 벌벌 떨었을 것도 같다. 아무도 없다거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기이한 정적은 덜 두렵지만 사람이 제일 무서우니까. 아파트에 살기로 한 건 초보 여성귀촌인에게 괜찮은 선택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동네 어르신들 모시고 입주 신고를 해야 한단다. 선배 귀농인들의 후기를 읽어보면 식사 대접 외에 꽤 많은 돈을 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옆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생활은 무관심으로 존중해주는 도시 생활과 달리 시골에서는 동네분들이 불쑥불쑥 문 열고 방 안까지 들어온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왠지 나는 혼자 마을에 들어가서도 옆집 할머니랑 친구 먹으면서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마음의 소리 : 벌써 잊었냐? 발리 갈 때도 왠지 잘 될 거 같았지. 의기소침해져서 금방 돌아왔잖아)
혼자 오는 남자도 이상한 눈으로 본다는데, 여자는 마을에서 어울려 살기 더 어렵겠지. 아침에 나가고 저녁에 들어오는 직장인이라면 특히 더. 그래, 아파트 살기 잘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어서 여기로 오긴 했지만 이왕 온 거 좋은 점을 보면서 잘 살아보게요.
집주인의 전화
“기존에 알려준 금액이 상하수 요금도 포함된 금액이었다고 하네요. 관리비중간 정산해서 온 거 사진 찍어 보냈으니 한 번 확인해보세요”
흠. 괜히 내가 이번에도 진 것 같은 기분이다. 집주인 아저씨랑은 웬만하여선 앞으로 통화할 일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