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고 싶으면 좀 해. 힘들면 하지 말고.

불안하고 무력하다 갑자기 부지런해진 일요일

by badac

오늘은 불안한 일요일이었어.


당연히 아침에는 어제처럼 일어나기 싫었지. 몸은 무겁고. 밥 달라 놀아달라 보채는 고양이를 모른척하면서 무거운 머리를 베개에서 떼지 않았고 더 더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어.


1시까지 출근하려면 늦어도 12시 반에는 나가야하고 그러려면 11시 반에는 씻어야 한다. 그럼 11시까지는 걱정 없이 누워있어도 괜찮겠지? 그렇지만 9시부터 불안했어. 으악, 앞으로 2시간밖에 안 남았잖아. 이렇게 가기 싫은데 어떡하지. 사실 8시에도 불안했지. 10시까지도 누워서 계속 초조해하다가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거 같아서 일어났어.


밥을 할 기력은 없어서 간단히 국수를 삶았지. 이런 내가 이해가 잘 안 갈수도 있는데 밥을 하면 반찬이 마땅치 않지만 국수를 삶으면 그냥 적당히 양념장을 만들면 비빔국수가 되거든, 그래서 라면 끓이는 것처럼 쉬워. 라면 보다는 국수가 뭔가 덜 해롭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국수를 요즘은 자주 해먹게 된다고. 여튼 국수를 삶고 고명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양배추를 썰었어. 그러고 나니 나름 너무 탄수화물막 먹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조금 안심도 되고 그랬어. 그리고 대파 한 개를 썰어서 밀가루 약간 뿌리고 물은 아주 조금만 넣어서 반죽인 듯 아닌 듯하게 만든 다음에 후다닥 파전도 하나 부쳤지. 아주 간단하게 말이야.


여튼 간단하게라도 먹을 생각을 하니까 그나마 몸이 좀 움직여졌어. 그래서 10시에 일어났고, 샤워를 한 거 같아. 도저히 씻지 않고는 나갈 수 없는 상태였거든. 머리도 며칠 안 감아서 가렵고. 그래서 샤워를 하니까 정신이 또 나길래 얼른 세탁기를 돌렸어.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동안 샤워하고 밥 먹으면 나가기 전에 빨래 널 수 있겠다. 그런데 그러면 건조대에서 걷은 빨래를 개야 하는데 방바닥에 머리카락이니 먼지니 너무 더럽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운을 더 내서 청소기를 한번 돌렸어. 걸레질까지는 도저히 못하겠고 일단 청소기만 후다닥. 그렇게 샤워하고 청소하고 국수 삶고 부침개 부쳐서 밥 먹으니까 빨래가 다 됐고 빨래도 개고 설거지도 하고 고양이 화장실도 치우고 물도 갈고 하니까 천천히 시간이 가더라고 그래서 12시 반쯤 집을 나서서 1시에 출근했어.

갑자기 엄청 부지런한 하루가 됐지.


오늘 회사에 간 이유는 교육 일정이 있어서 직원이 문을 열어주고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야 해서야. 대여섯시간을 그냥 지키고만 있어야 해서 책을 읽었어. <출판이 뭐라고> 라는 1인출판사 운영자의 에세이랑, 권김현영의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두 번째 책은 집중력이 떨어져서 읽기가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워낙 내용이 좋으니까 술술 읽혀. 첫 번째 책은 자기가 출판하고 싶은 책을 직접 번역하고 계약하고 출판사까지 차려서 낸 이야기다보니까 내가 진짜로 원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저렇게 뛰어들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는 책이었지.


그런데 도대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하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긴 해. 마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책을 두 권이라 읽었는데도 끝날 기미가 안 보여서 일기장을 채우기 시작했지. 하루 있었던 일을 주로 쓰는데 브런치에 날마다 쓰는 일기에 거의 일과를 촘촘히 쓰다보니 이틀 밀린 일기에도 또 똑같이 뭐 먹었고 뭐했고 쓰기가 거시기 한 거야.


뭔가 더 중요하고 심각한 내면의 이야기를 써야만 할 것 같고 말이지.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 쓰다보면 또 생각이 풀리기도 하니까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뭘 할 때 즐겁고, 뭘 하고 싶지 이런 질문에 답을 막 써봤어. 뭔가 짠, 하고 멋진 일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기는 한데 그걸 행사기획이라고만 하면 또 뭔가 부족한 거 같고 영 잘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도 에세이를 읽고 쓰는 일은 즐겁다. <나를 부르는 숲> 이나 <와일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같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단 말이지. 그럼 내가 2011년에 갔던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기를 지금이라도 정리해서 다시 써보면 어떨까 까지 생각이 이어졌지. 빌 브라이슨처럼 유쾌한 글을 쓸 수는 없지만 나도 솔직하게 쓰는 건 좀 잘하잖아.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고. 그런데 벌써 거의 10년이나 지난 자전거여행기라니 쫌 그런가. 아니, 근데 누가 생각하기에 쫌 그렇다는 거야. 내가 이걸 베스트셀러로 만들어서 돈 벌겠다고 작정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쓰는 거 자체가 즐거우면 되지 않나. 옛날에 좋았던 시절 운운하면서 현재를 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염려도 들었다가 아니 그러면 좀 어떤가. 지금 우울한데 예전의 좋은 추억, 기억 곱씹고 좀 그러면 안되나? 게다가 매일매일 써놓은 일기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걸 다시 읽고 가공해서 읽을만한 글로 만들면 좋잖아. 나한테 좋다는 말이지.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자에게도 좋고. 그때의 비현실적인 풍경 사진만 봐도 좋지 않을까.

집에 와서 외장하드를 뒤져서 그때의 일기와 사진을 다시 봤어. 사진도 엄청 좋은 건 아니고 일기도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어. 이게 뭔가 재미있는 글의 소재가 될까? 이 시국에? 근데 이렇게 너무 계속 무력하고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 같은 시절에 약간 해보고 싶은 일이라는 마음은 들었어. 늘 마음 속에 그때의 여행을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거든. 그리고 일기를 읽다보니 크건 작건 사건은 있으니까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싶고. 그때 만난 사람, 갔던 장소, 있었던 일이 다 생생하게 생각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렇게 그냥 다 잊혀지면 슬플 거 같아서 지금이라도 좀 정리해놓으면 어떨까 싶어. 그냥 내가 하겠다는데 뭐. 그냥 하면 돼지.

퇴근하고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어. 지난 주에 장을 볼 때는 과일을 안 샀거든. 과일이 사실 사탕 같은 거라고. 채소 많이 먹으라고 하는 거랑은 다르다. 당분만 많은 것이니 건강에도 다이어트에도 좋지 않다고 읽어가지고 음 그럼 나는 오이 당근 파프리카 양배추 양상추 같은 거 실컷 먹으면 되니까 안 사. 그리고 과일은 비싸니까 절약해보지 하는 마음이었어. 근데 사과도 못 먹고 딸기도 못 먹고 맨날 오이 당근 양배추만 먹으려니까 허전하고 좀 우울하고 그랬어. 양배추도 오이도 엄청 달고 맛있기는 한데 사과랑 딸기랑 먹고 싶더라고. 그래서 여섯 개짜리 사과 한 봉이랑 딸기 1킬로그램을 샀어. 딸기는 제일 싼 거 사긴 했는데, 그래도 여기는 딸기 주산지라 달고 맛있어. 작아서 상품이 아니라 싼 거야. 오후부터 계속 비가 내려서 우동이나 부침개가 먹고 싶었거든. 그래서 우동면을 살까, 우동라면을 살까, 하다가 어묵을 샀어. 국물내서 국수 삶아 말아먹으면 충분히 내가 원하는 맛이 나니까. 돈도 덜 들고. 대신 양파 무 같은 걸 샀지. 그리고 집에 와서 어묵탕 간단하게 끓여서 물국수 해먹었다. 맛있었어.

집에 계속 늘어져 있는 거보다 조금 몸을 움직이고 일정이 있으니까 덜 쳐지고 낫더라고. 책도 두 권이나 읽었고, 빨래 청소도 간단히 했고, 다음주에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마음의 워밍업도 했잖아. 물론 또 동시에 나는 왜 이렇게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인가 하면서 또 쫌 싫은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런 생각 좀 하지마. 그냥 하고 싶으면 좀 해. 힘들면 하지 말고. 그래서 2011년 자전거 여행할 때 사진이랑 그때 기록했던 일정표랑 꺼내봤어. 슬슬 글로 정리해볼 수 있다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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