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바지 한 번 직접 사본 적이 없다.

다짐의 왕답게 다짐해보자면

by badac

우리집에서 제일 비싼 가구는 가지의 캣타워다. 위치도 거실 겸 큰 방 정중앙 유리창 앞이다. 고양이에게 캣타워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작년에 샀다. 인터넷 카페에서 추천한 제품이었다. 소파, 책장, 옷장 같은 큰 가구는 제작년 우울증이 한창이던 시기에 샀다. 이사하고 나서 옷이며 책이며 정리하지 못한 채 방바닥에 널부러진 게 보기 싫어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쉽지 않았다. 옷이며 신발도 마흔 살 가까이 언니나 지인이 준 걸로 받기만 했던 사람이라 생활에 필요한 걸 사본 적이 거의 없었다. 맨 처음 집을 얻을 때 세탁기와 냉장고도 언니들이 골라서 주문해줬다. 속옷을 사는 일부터 청소용품, 주방용품을 사는 일을 여전히 잘 못한다. 하물며 가구라니, 지금 하라고 해도 똑같이 어려울 거고 그땐 더 어려웠다.

제일 먼저 산 건 옷장이었고 몇날 며칠 친구랑 같이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가구 거리에 가서 매장도 둘러봤다. 가구매장에서 일하는 친구한테도 물어보고, 살림꾼 친구한테도 물어보고,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몇 주가 흘렀다. 나한테 너무 거대한 과업이어서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같이 가구점에 가준 친구는 중학생 딸도 있는 동갑내기로 가족도 챙기고 집도 챙기고 여튼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데 나는 이것밖에 안되냐 하는 마음으로 혼자 비교하면서 더 쪼그라들었다. 그러다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자취 경력이 나보다 훨씬 오래된 동갑내기 비혼여성에게 자기가 주로 애용하는 회사에서 쇼핑하는 법을 전수받았고 그냥 그이가 괜찮다고 하는 걸 덜컥 주문했다. 페미니스트는 ㅎ제품 불매해야하는데 가격이 싸다고 사면 좀 그렇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그냥 했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솔직히 가격은 중요했다. 그래도 옷장 한 번 사고 나니 책장이랑 소파를 사는 건 옷장보다 훨씬 쉬웠다. 책장도 혼자 골랐고 소파는 싼 조립식을 사서 직접 조립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서 ㅎ사의 매출이 안 나오던 시기라 할인행사를 많이 했다. 페미니스트로서 부끄럽게 ㅎ사 제품을 너무 많이 샀다.

옷장 안을 정리하는 건 새롭게 어려운 과제여서 일단 다 옷걸이에 걸어 집어넣고 문만 닫았다. 상자나 서랍을 이용해서 정리를 잘 해야하는데 또 뭔가를 사야한다는 사실에 겁먹고 저렴하게 플라스틱 정리용 바구니를 몇 개 사서 밑에 두었다. 산 옷은 거의 없지만 누가 준 옷, 얻어온 옷 등으로 옷장은 가득 차 있다. 옷도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해야할 텐데 그것조차 해본 적이 거의 없으니 늘 미루고만 있다. 작년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때 대형마트 할인매대에서 5천원 행사하는 옷을 세 개 샀다. 상담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방 두 개랑, 긴팔 티셔츠 한 개. 매장에서 혼자 옷을 산 건 거의 처음이었다. 내 돈 주고 옷이란 걸 산 일 자체가 거의 없어서 어떤 사이즈를 사야하는지, 나한테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도 몰랐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작은 건 못 입지만 큰 건 입을 수 있겠지 하고 사왔는데 커서 그런가 별로다. 언니랑 같이 살고 있다면 긴팔 옷이 없어, 라고 할 때 같이 인터넷 쇼핑몰을 보면서 주문을 할 수도 있고 엄청난 언니 옷장에서 원하는 색과 스타일의 옷을 바로 꺼내 주기도 할 텐데 이젠 그럴 수 없으니까 혼자서 옷 정도는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옷도 하나 못 사는 어른이 된 게 챙피하기도 하고, 맨날 필요하다고도 하기 전에 옷을 사줘 버릇해서 나를 이렇게 만든 가족이 밉기도 하다.

청바지 한 번 직접 사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는 적당히 언니가 준 옷을 입고 버티다가 정말 입을 게 없어지면 언니한테 가서 얻어오곤 했다. 나는 꾸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예쁜 옷에 관심도 없고 예쁜 게 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옷은 언제나 집에 많았으니까 굳이 내 돈을 들여 살 필요가 없었다.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돈도 아까워서. 외모나 옷에 거의 관심은 없지만 아주 없었냐 하면 그건 아닌 거 같다. 친구들이 예쁜 옷을 입으면 좋아보였고 나도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어짜피 예쁘지 않으니까, 혹은 굳이 예뻐야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는 식으로 금방 생각이 흘렀고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돈이 아까워서 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작년 베를린 여행을 갔을 때도 그럴듯한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다. 마트에서 빵과 과일을 사 먹고,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런 곳에 가면 주눅이 들어서 돈을 쓰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까 그럴바엔 그냥 돈이나 아끼자 이런 마음이었다. 테이크아웃 음식을 사와서 그냥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다. 두려워서, 돈이 아까워서 웅크린 거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나의 운명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두려움을 감수할 수 있다. 혼자라면 절대 못하고 안할 거지만 우리 둘을 위해서라면 좀 두렵지만 해볼게, 가 된다. 이게 남의 눈을 의식하는 부끄러운 태도라고만 생각해서 이런 나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책임강이 강하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누군가와 있을 땐 혼자 있을 때와 다른 모습인 거 같다. 지금 당장 그런 내가 어떻다, 왜 그렇다, 어떻게 변하겠다,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데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돈이나 외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짐의 왕답게 다짐해보자면, 처음이 어렵지 익숙해지면 괜찮은 것들이 많으니까 내가 해보지 않은 것, 두려워하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청바지도 하나 사고, 혼자서 혹은 좋아하는 친구에게 먼저 말해서 비싼 레스토랑에도 가는. 돈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취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비하하지도 말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섬세하게 바라보자. 솔직히 나는 독서를 많이 하지 않는 게 콤플렉스다. 소설을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학생 때 밥값을 아껴서 책을 사서 봤다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먹고 싶은 걸 어느 정도는 사 먹을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도 읽고 싶은 책을 막 사지 못한다. 사도 안 읽으니까 그럴 거면 사지 말고 도서관에 신청해서 기다렸다가 읽자 하고선 신청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신청해놨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읽고 싶은 책 정도는 돈 아까워하지 않고 사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충분히 그 정도는 번다. 돈 없을 때 서점에서 서서 다 읽어버릴 정도로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간 많을 때 대형서점에 서서 소설책을 다 읽어버릴 정도로 돈을 아끼는 사람이기는 했다. 매달 10만원 정도는 책값에 투자해도 좋다고 생각 하지만 실제로 그러지 않는다.

사실 오늘 가구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 건 오후의 독서에 대해 자랑하고 싶어서였는데 그 얘기는 하나도 못했다. 글을 쓴다는 건 정말 처음에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르게 뻗어나가기도 한다. 밖이 보이는 창을 찾아 집에 있는 의자 중 한 개를 들고 비상계단을 통해 13층까지 올라간 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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