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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09. 2020

이제부터 귀한 내 마음은 보내고 싶은 곳으로 보내야지

후원 해지 요청 전화를 걸었다

후원금을 내던 단체에 전화해서 그만 하겠다고 말했다. 재작년에 회사에 입사하면서 회사 모법인(아주 같지는 않지만 본사 비슷한 개념)에 후원금을 내기 시작했었다. 그 단체가 우리 회사와 같은 회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존경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후원회원으로 가입했다. 그 단체에서는 우리 회사를 소속 부서 정도로 여기고 상사님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체가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의 계약을 맺었고 나는 그 사업팀에 합류한 거다.


회사와 상사들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상사로 대표되는 단체의 진정성까지 의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쨌든 더 이상 단체의 후원회원이고 싶지 않아졌다. 퇴사한 동료는 바로 전화해서 해지했다고 한다. 그래도 선뜻 해지전화를 할 용기가 잘 안나고 조심스럽다고 말했더니 동료가 힘을 보태준 한 마디. “어휴, 지금까지 낸 돈도 아까워요.” 맞다. 지금까지도 속은 것 같은 기분인데, 앞으로 어떤 마음도 후원도 더 이상 보태고 싶지 않다.

어느 정도의 용기였을까. 회사의 분위기를 상상하지 못하는 내 친구는 삼성 직원이 아이폰 쓰는 것 같은 거냐고 물었다. 비밀보장에 궁금하다고 사연으로 왔던데 요즘 삼성 직원들도 아이폰 많이 쓴단다. 나는 가족이 운영하는 통신사 매장에서 휴대전화도 안 사던 사람이었지만 이번 건은 좀 떨렸다. 예전 회사에서 꼭 조합원으로 가입해야하냐고 묻던 동료 생각도 났다. 협동조합의 사무국에서 직원으로 일했었고 동료 외의 모두는 조합원이었다. 내규에 조합원만 입사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전까지는 직원이 되면 당연히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퇴사하고 나서도 조합탈퇴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조합원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그 친구가 왜 꼭 직원이 조합원으로 가입해야하냐고 물었고, 아무도 대답하지 못해서 가입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30만원이나 내는 조합비를 내고 가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단체에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은 나였다. 진심으로 그 정도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오만 정이 다 떨어졌고 불현 듯 어제 가계부를 쓰다가 굳이 내가 세금처럼 후원금을 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로 전화해서 후원을 그만하겠다고 말했고 전화 받는 담당자가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말했더니 알겠다, 처리하겠다고 한다. 너무도 쉽고 간단했다. 대기업 콜센터처럼 본인확인을 하는 것도 아니고, 회원이 많은 것도 아니니 내가 누구인지 전화받는 사람은 알았을 것이다. 전화 끊고 세상에, 누가 회원을 그만하겠대요 라고 말하며 수근거릴것만 같아서 신경이 쓰였지만 그래도 했다! 잘했다.

저녁엔 비영리단체들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나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회사생활의 고통을 토로하며 같이 화내고 뭐라도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마음은 이런 곳에 모아야지.


너무 큰 목표를 세우고 판을 다 갈아엎을 생각으로 일을 벌이면 준비하다 지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천천히 해보자고 했다. 불합리와 부조리, 정의롭지 못한 것들을 모조리 세상에 알려서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나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먼저 본인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기록하며 치유해보자고 했다. 얼마나 힘든지, 왜 힘든지, 뭐가 문제인지 글로 써보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생각해보기로. 그런 것들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하다보면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 더 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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