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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10. 2020

매일매일 쥐어짜듯 기력 없는 와중에도 이렇게 쓰다보면

뭐라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기쁨을 줍니다

오늘은 그런대로 컨디션을 보통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청소를 했거든요.

새벽에 가지 밥을 주고 다시 누워서 잠들면서,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게 종일 자는 거 아닌가, 어제처럼 오늘도 종일 잠만 자면 안되는데... 내일이면 출근해야하는데 오늘 해치워야 할 집안일 때문에 가슴이 턱 막혔습니다.


음식을 챙겨먹는 것도, 방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고양이 화장실을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재활용 분리수거를 내놓는 일도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밥이 없으면 쌀을 씻어 바로 밥을 하면 되는데 집에 있는 쌀을 잡곡이랑 콩이랑다 섞어놔버려서 미리 불려놓지 않으면 밥을 해도 콩이 설익거든요. 그래서 최근엔 밥을 하지 못하고 국수를 삶아 먹거나 라면을 먹거나 빵을 먹었어요. 어제는 국수도 싫어서 냉장고에 남아있던 순두부 하나를 간장이랑 피시소스 뿌려서 먹고 배가 안 차니까 며칠 전 친구들이 왔을 때 먹고 남은 맛동산 과자를 먹었고요. 다시 누워있는데 배에서 어찌가 부글부글 거리던지 종일 설사를 했습니다. 순두부 유통기한이 하루인가 지났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어쨌든 밥을 해야할지 않을까 잠결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쌀을 불려뒀죠. 고양이 밥을 주고 다시 눕기 직전에요. 지금 쌀을 불려놓지 않으면 또 아침에 밥을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라면을 끓여먹을까 국수를 삶아먹을까 고민하게 될 거 같아서요. 밀가루 말고 밥이 먹고 싶었거든요. 다행히 게으름과 귀찮음을 이기고 쌀을 불려놓고 나니 늦잠자고 일어났을 때 밥을 할 마음이 생겼어요.

밥을 올려두고, 어제 쌓아둔 설거지를 하고 내친김에 청소기로 방을 싸악 밀었습니다. 물걸레질까지 할 기운은 없어서 그냥 청소기만 밀었는데 그렇게만 해도 급한 불은 끄는 것처럼 집이 조금 정리되거든요. 너무 완벽하게 청소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미루기만 하면서 절대 안하고 집은 더 엉망이 되니까 물걸레질은 못하겠지만 청소기를 밀 기운만 있다면 청소기만 돌리자, 로 청소에 조금 너그러워지니까 한결 낫더라고요. 내내 지저분한 것보다는 좀 덜 지저분한게 낫잖아요. 그렇게 몸이 좀 움직이기 시작하면 조금더 조금더 일을 할 수 있게 돼요.세탁기를 돌려야 하는데 날도 흐리고 세탁기를 돌리려면 빨래도 걷어서 빨래줄을 비우고 개켜서 넣어야 하는데 너무 귀찮잖아요. (몇주전에 이런 똑같은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언제나 역시 너무 귀찮습니다) 그래도 빨래를 계속 미뤄둘 순 없으니까 세탁기를 돌리고, 그 사이에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놓습니다. 현관에 모아두는데 어제 고양이 사료 주문한 게 와서 큰 박스가 놓여있거든요. 사료 소분도 해야 하는데 그냥 뒀더니 냄새를 맡은 가지가 자꾸 푸대를 긁어대서 현관 중문 밖으로 꺼내놨어요. 봉지 뜯어서 사료가 쏟아지면, 으윽 생각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집니다. 다행이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나니 사료를 소분할 기력도 생기더라고요. 통과 지퍼락에 나눠서 사료를 담고 각종 분리수거도 내다 놓습니다. 그사이 빨래가 다 되었다고 해서 급하게 건조대에서 빨래를 걷어 방바닥에 내팽개쳐놓고 빨래를 넙니다. 아이고 지친다. 일단 밥을 먹어야겠어요.

반찬이 마땅치 않아서, 참치캔을 하나 까서 마요네즈에 버무렸어요. 친구가 준 김이 조금 남아있어서 참치마요삼각깁밥 기분을 좀 내려고요. 역시 친구가 준 깻잎김치랑 열무김치를 반찬삼아 든든하게 먹고 커피를 내려마십니다. 빨래를 개켜 넣고, 쓰레기통을 비우면 오늘의 집안일은 끝납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앉아서 다음 할 일을 할 기운이 나길 기다렸는데 나지 않더라고요.


싫다 싫다 하기 싫다 미치도록 하기 싫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있다가 겨우겨우 일어나 쓰레기통을 비웁니다. 쓰레기통에 봉투를 새로 채워넣으면서 내가 쓰는 종량제봉투가 10리터인 걸 새삼 알아차랍니다. 몇 주 전에 20리터 봉투를 20장이나 샀거든요. 10리터 짜리도 채우는 데 2주가 걸려서 5리터 짜리 쓰고 싶었는데 안 팔아서 10리터 쓰는 거거든요. 근데 헷갈려서 20리터를 산 거에요. 너무너무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났어요. 영수증도 다 버려서 바꾸러 갈 수도 없고 쓰레기통은 10리터 짜리라서 20리터 봉투는 그냥 쓰레기 봉투채로 써야하는데 다 맘에 안 들어서요. 다시 주저 앉아서 신경질만 냈어요. 누구 줘도 되고 그냥 써도 되고 나중에 혹시 교환되는지 물어보면 되는데 다 너무 싫어서요.


그렇게 한참 앉아있다가 밥 먹었어요. 아까 밥 먹으면서 이따 저녁으로는 생선 구워먹으려고 냉동실에서 조기 3마리 꺼내서 해동시켜놨거든요. 무기력하다면서 먹을 건 잘 챙기죠?

생선 굽는 거 냄새가 심해서 잘 안하게 되는데 누가 먹으라고 주면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식탐도 많고 돈도 아끼고 싶으니까. 그래서 굽는 김에 세 마리나 먹어버렸어요. 요즘 요리하기도 귀찮아서 장볼 때도 별 생각이 없었거든요. 다음주 도시락은 삼분카레랑, 삼분짜장, 유부초밥이나 먹어야겠어요. 밥을 먹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건지 할 일이 생기니까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이게 된 건지, 생선굽고 생선먹고 설거지하고 나니 빨래도 마저 개켜서 얼른 넣어버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짠! 빨래까지 넣고 오늘의 할 일을 다 마쳤답니다.

어제 샤워도 하고 머리도 감았지만 샤워를 또 했어요. 이렇게 말하니 너무 지저분한가요. 매일매일 샤워 안할 수도 있잖아요. 날마다 머리 감아요? 저는 이틀에 한 번 감는데요? 근데 수요일에 출근하면서 감고 회사 너무 가기 싫어서 지각 직전에 출근하다보니 목, 금까지 안 감은 거에요. 그러다보니 어제 토요일에 너무너무 간지러워서 그 하루종일 자는 와중에 일어나서 머리 감고 다시 잤어요. 일단 일어나서 씻으니까 힘이 좀 생겨서 나가서 장도 봐온 거고요. 그렇게 오늘도 샤워를 하고 났더니 기분이 좀 나아져서 친구가 주고 간 백차를 우려서 마십니다. 우울할 때 산책이나 뭐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샤워도 좋아요.

어제 일기를 너무너무 쓰기 싫어서 겨우 소파에 누워서 썼는데, 그래도 역시 성실한 저는 안하는 것 보단 그거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나봐요. 찔끔 눈물이 났어요. 참 대단하다. 대단히도 성실하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구나. 매일매일 쥐어짜듯 기력 없는 와중에도 약속한 거 지키려고 해서. 물론 엄청 좋은 글, 재밌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야 있죠. 이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일기가 뭐나 되나요.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는 하지만 좋은 글은 아니죠. 그럴거면 일기장에나 쓰라고요? 저 일기장에도 또 따로 일기 써요. 그냥 성실하게 하루하루 이런걸 쓰는 걸 좋아하나봐요. 잘 쓰고 싶지만 아주 재미있거나 잘 쓴 글은 아니라고 해도 이렇게 꼬박꼬박 성실하게 한칸한칸 채워가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하고 뿌듯해하나봐요. 그리고 이렇게 많이많이 쓰다보면 더 좋아지겠죠. 오늘은 넋두리가 길었습니다.

재미있는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왜 이러고 있는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남들 잘 되고 잘 지내는 거 부러워서 비교되는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때면 무조건 당장 멈추라고 상담선생님이 그러셨어요. 그래서 멈춥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잘하고 있는 것, 다행스럽고 고마운 것을 생각하자면 그런 것들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런다고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뭔가를 쓰고 있다는 사실만은 그래도 순수하게 기쁨을 주는 일이에요 저한테는. 그래서 이렇게 숨이 차게 오늘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요며칠 지각해서 자정을 넘겼는데 오늘은 일찍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또 손으로도 일기장에 뭐라도 마구 쓰러 가보겠습니다. 내일 만나요, 숨은 독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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