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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21. 2020

일단 뭐든 막 다 써

쓰는 시간만이 덜 괴롭다


아침에 손글씨로 쓴 일기 반 쪽
근무시간에 다른 블로그에 쓴 회사욕
책 선물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보낸 장문의 안부 메일 (원고지 17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쓴 손글씨 일기장 2쪽 반
그리고 지금 쓰는 오늘의 브런치
 
문자 메시지나 카톡, 업무상 쓴 글을 제외하고 오늘 저만큼 썼다. 나처럼 어쩔 줄 모르는 답답함, 외로움, 우울증을 호소하는 친구에게도 이 방법을 추천했다. 쓰고 쓰고 쓰고 또 쓰기. 일기를 써 버릇 안 해서 자꾸 똑같은 말만 쓰는 거 같아 지겹단다. 나도 지겹다.

나도 내가 쓰는 글들이 아주 재밌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쓰는 시간만이 덜 괴로워서 어쩔 수 없이 뭐라도 쓴다. 손글씨 일기장과 블로그 일기장에 쓴 글이 같을 때도 있고, 손글씨 일기장에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아무 말이나 쓰는 날도 많다. 그래도 쓴다. 괴로움을 잊을 다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쓴다. 쓰기처럼 편하고 쉽게 집중하고 오래 지속할 수 있고 끝나고 나서 처음보다 더 괴롭지는 않은 행위가 없다. 먹고 나면 더부룩하고 후회가 가득하고 너무 많이 자도 머리와 허리가 아프다. 달리기나 명상은 좋지만 시작도 지속도 어렵다. 그런데 나에게 쓰기는 제법 쉽고, 효과가 빠르고 적당하다. 내가 쓰고도 너무 잘 썼다, 내 마음이 아주 후련해진다, 하는 글이 라면 효과가 더욱 클 거 같은데 그 정도는 아니고 쓰는 순간만큼은 괴로움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쓰고 나면 이것도 글이라고 뭔가 뿌듯하다.

쓰는 순간에는 쓰는 행동 자체에 몰입할 수 있어서 좋다. 친구도 없고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낀 청소년이 독서에 빠져들어 책속의 세계로 도피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달리기, 명상, 낚시, 요리, 청소 등 현실을 잊게 만드는 취미나 활동을 가지라고도 한다. 쓰기는 내게 그런 행위다. 손을 움직여 글과 말을 이어가다보면 그 다음 단어에만 집중하게 된다. 달릴 때 다음에 디딜 발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많이 쓰면 무조건 나아진다고들 하는데 이런 브런치 글을 한 달 더 쓴다고 해서 한 달 전보다 눈에 띄게 나아질 거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지 않고 손가락이 자동으로 쓰는 것 같은 글은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릴 것 같다. 가끔은 그래도 점점 생각과 구조가 완결된 글쓰기로 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다시 그냥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아무 말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자전거 타기를 몸이 기억하는 것처럼 나의 쓰기는 나의 몸이 기억한다. 아무 말이라도 쓰라고 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쓸 수 있다. 손글씨 일기장은 그런 식으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쓴다. 쓰고 또 쓴다.

오늘도 핸드폰을 다른 방에 두고 자러 갈 예정인데 자기 직전까지 트위터가 하고 싶으면 일기를 쓸 것이다. 내가 그렇게 트위터를 하는 것도 아무말이나 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겠어.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거의 십분 간격으로 핸드폰으로 와서 들여다보고 돌아가고 들여다보고 돌아갔지만 그래도 잠자리에 안 들고 간 게 어디야. 장하네, 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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