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15
이삭줍는 식생활
냉장고가 없어서 무작정 뭘 사면 안 된다. 매일 퇴근길에 간단히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 먹을 거리를 조금씩 사서 지내려고 한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보름째지만 지난 연휴에 남은 채소와 달걀, 얻은 두부와 감자, 빵 덕분에 아직 저녁거리를 사러 읍내에 나간 적은 한 번밖에 없다.
어제는 먹을 게 똑 떨어져서 퇴근길에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사무실 텃밭에 고구마가 영글었다며 상사 ㅅ이 고구마 두 개를 시험 삼아 따왔다. 오호라, 오늘 저녁은 저 녀석이다. 그리고 내일은 고구마를 캐서 저녁을 먹어야겠다. 내 생활이 궁상맞은가? 인스턴트 음식이나 사 먹는 음식으로 매 끼니를 때우지 않고 직접 집에서 요리를 해먹고 싶고 여건이 가능하다면 채소는 텃밭에서 직접 기르고 싶다. 아직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으니 사 먹거나 얻어 먹거나 할 뿐. 버려지는 음식물이 많아 주워먹고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얻어먹고 주워먹는 식생활에는 나름 자부심도 있다.
자급생활의 원칙
돈을 벌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 돈을 아껴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웬만하면 직접 해야 한다. 커피를 포기할 수 없어서 3천 원 내고 커피집 커피를 사 먹는 대신 원두를 사서 직접 내려마시고, 생두를 사서 직접 로스팅 해서 먹었다. 샴푸를 쓰지 않고 머리를 감아보는 것이 유행하던 때에는 환경과 머릿결을 생각하는 마음에 더해 비용을 줄이기 위한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나는 집에서 사는 게 아니라 가방을 싸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짐이 간소해지면 질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1~2 주일에 한 번씩 비누나, 샴푸를 쓴다).
지난 4년 간 백수 시절에는 직접 커피를 만들고, 직접 팥빙수를 해 먹고, 그러다 장사를 해서 돈을 받고 팔기도 하고, 직접 노래를 만들고, 직접 책을 만들고, 할 수 있는 해보면서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돈을 직접 밭에서 캐거나 사람에게 얻을 수 없어서 직접 벌기로 했다.
그래도 최근 직접 한 것 하나. (전자) 책 출간 기념 이벤트. 발리 다녀와서 정보가 가득한 가이드북을 직접 쓰고, 직접 찍고, 돌아다니면서 직접 팔 생각으로 책을 만드는 중에 출판사와 연이 닿아 전문가의 손을 빌렸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산 세월도 있었으나 역시 중간에 권고사직당했던 경력이 어디 가나, 중간쯤 되자 내가 뭐하는지도 모르겠고 하기 싫어 미치겠는 걸 겨우겨우 끌고 나가던 중이었다. 출판사를 통한다면 내가 하고 싶던 대로 책을 못 낸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지금 책이 못 나올 판이니까. 내가 A급 필자도 아니고 뭐 먹힐만한 파워블로거도 아닌데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기가 쉽겠냐 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냥 고맙습니다, 했다.
두둥. 책은 나왔다. (나 혼자 발리) 이것저것 출판사랑 재밌는 걸 해볼까 하고 말이 오갔지만 결국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나는 책이 나오면 정성껏 사인해 고마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원래의 취지를 살려 나 혼자 출간 기념 이벤트를 준비하고 실행 중이다. 총 14단계의 수작업 공정을 거쳐 편지를 쓰고 편지를 부친다. (아직 보내고 싶은 사람의 반에게도 못 보냈다)
출근할 때는 자동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두 발로 직접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한다. 빨래도 청소도 직접 한다. 언제까지 이 생활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은 맘이 사라지지 않는 순간까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런 의미에서 자작곡 ‘하고싶’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