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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un 17. 2020

일주일 병가를 준 회사를 칭찬한다.

다행히 당장 도망쳐야 할 회사는 아니다. 서서히 도망쳐야 하는 건 맞다.

출근을 했다. 했었다. 

두어 시간만에 퇴근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목은 다시 칼칼한 것 같았고 콧물이나 가래도 여전했다. 열이 나지 않으니까 코로나는 아닌 것 같아도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뉴스에서 권장하는 대로 몸이 좀 안 좋으니 3~4일을 쉬겠습니다, 말할 수는 없었다. 

하루 쉬겠다고 하는 건 쉬웠다. 이틀째에도 고민이 많기는 했지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흘째는 내 핏속에 흐르는 k-직장인 유전자 때문인지 나조차도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출근했다. 마스크를 철저하게 쓰고 손도 더 자주자주 씻어야겠다는 결심 정도를 하면서.


출근하니 상사들은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딱히 급한 일은 없어서 이틀 동안 자리 비운 것에 대한 상황파악 정도를 하고 있었고, 회의를 마친 팀장이 나를 보고는 깜짝 놀란다. 아니 계속 쉬지 왜 나왔냐며, 월요일에 사무실에 비가 새서 침수 사고가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내내 에어컨을 틀고 있으니 근무상황이 너무 열악하다, 바쁜 일 없으니 이번 주는 안 나오고 쉬는 게 좋겠다며, 당신이 먼저 나서서 센터장에게 가서 보고한다. 

잠시 후 센터장이 와서, 코로나가 아니고 감기나 인후염이라고 해도 쉬어야 나으니까 쉬라고 한다. (굳이 너가 없으면 지장이 생기기는 하지만, 안 괜찮기는 하지만, 하면서.. 안 했으면 ‘서운’할 말을 덧붙여서 나를 미안하게 하기는커녕 역시 센터장은 상황판단이 전혀 안 되고 있구나, 조직의 팀원들이 무슨 일을 지금 하고 있는지 바쁜지 안 바쁜지 전혀 모르는구나 알게 되었다. 조직이 엄청 큰 것도 아니고 5명인데. 그치만 뭐 센터장이라는 직책이 원래 그럴 테지.) 


팀장이 의외였다. 평소에도 휴가도 거의 안 쓰고 워커홀릭처럼 일하면서 사무실 분위기를 팍팍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남들도 못 쉬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나보다. 아니면 지금이 특별한 상황인가, 굳이 내가 그 이면의 의도까지 찾아낼 필요는 없으니까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옆자리 동료에게 들어가란  말을 들었다고 했더니 깔깔 웃으며 (원하던 대로) 짤리는 거 아니에요? 라고 해서 한참 더 웃었다. 그래주면 고맙지. 실업급여도 받을 수 있고...


들어오는 길에, 재난알림문자를 받았다. 사업주들은 증상이 있는 직원들을 쉬게 하라고. 이런 거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있었던 걸까. 실은 아침에 선별진료소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아볼까 하고 전화를 걸어봤다. 아니면 내가 경기권에 다녀왔고 증상이 있으니 검사를 받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상담을 하고 싶어서. 그랬더니 단순감기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서면 일반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보고 안 나으면 오라고, 안 그러면 너는 검사 대상이 아니니 자비를 들여서 검사 받아야 한다고. 얼마냐 물었더니 최대 16만원.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는데 받아볼 걸 그랬나. 


집에 와서 뉴스 속보를 보니 전주시에 거의 한 달만에 확진자가 나왔다. 아직 동선이 공개되진 않았는데 청정지역이니 방역 성공이니 하던 지역이 시끄럽게 생겼다. 우리 아파트에도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가족은 보건소에 가서 진료 받으라고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소고기, 수박, 사과, 냉동만두, 사골육수 등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음식들과 과일을 샀다. 기운이 없고 우울할 때 소고기를 먹으면 난 좀 기운이 나드라고. 


맨날 회사욕 하는데 그래도 아프다니까, 전파자가 될까 걱정된다니까 일주일 푹 쉬고 오라고 말해주는 회사여서 머쓱하다. 고맙다고 말할 걸 그랬나, 아니 당연한 거니까. 고마워하지는 말고 칭찬해줘야겠다. 처음에 이 회사를 갈까 말까 고민했던 것처럼 당장 도망쳐야 할 수준은 아닌 거 맞았다. 서서히 도망쳐야 하는 건 맞지만. 자가격리이지 휴가는 아니라서 시간이 없다고 미뤄놨던 일-가지 병원에 데리고 간다거나 나 치과에 간다거나-을 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정말 정말 쉬어줄 수 있는 병가라고 생각하고 걱정 없이 편히 이틀을 더 쉴 수 있겠다. 


이런 휴가를 생전 가져본 적이 없다. 아파서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을 때나 아프다고 쉬었지, 전 같으면 이 정도는 거뜬히 나가서 일했다. 그러다가 쓰러지기 십상이었지만. 그러니까 정말 앞으로는 이 정도만 되어도 쉬어주고, 남이 쉬는 것도 나한테 부담이 돌아오지 않도록 조직 내에서 해결 방안을 마련해놓고 그 사람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해야지. 여전히 조금 불안하지만 괜찮은 날이다. 이틀 더 적극적으로 쉬고 나면 정말 이 감기가 나았으면, 제발 감기였으면 좋을 이 증상이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nNCOsLjLB0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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