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좋게 시작했다가 쓸쓸하게 끝난 일기
저녁을 먹고 낮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를 다 읽었다. 며칠째 마음날씨가 계속 맑음이다. 몇 주 전만해도 저녁 시간 내내 휴대폰을 붙들고 트위터만 들여다보면서 그러는 나를 못마땅해했는데 충분히 그런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지, 가을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우울한 시기가 끝난 건지 다행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아침도 좋고, 비가 기분 좋게 내리는 지금도 좋다. 복숭아 향이 나는 허브차를 우려서 사진을 한 장 찍어 올리고 일기를 썼다.
주말에 큰방 가구배치를 새로 하고,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아침마다 정리하니 자는 시간과 깨어 있는 시간이 정갈하게 구분되어 기분이 좋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가 잘 보여서 대충이라도 쓸고 닦으니 실제로도 더 깨끗하다.
책은 특별한 기술 없이 사무직 직장인이던 저자가 프리랜서가 되기까지의 경험, 되고나서의 이야기를 다뤘다. 원천 기술이라고 할 만한 전문성이 없기로는 나도 마찬가지라 평범한 문과 출신이 일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나 역시 회사 체질이 아니여서 이직과 퇴사를 반복했고회사 밖에서 살아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가 결국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어리석게도 지금 회사에는 조금 다른 기대를 품었다. 1년이 넘어가자 조직의 생리를 파악해버렸고 더 이상 특별한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회사나 스스로에게 내가 걸었던 기대도 허망해졌다. 좋아하는 동료는 퇴사했고 ("좋아하는 일을 해도 퇴사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인터뷰 영상 보기)나는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하면서 계약 만료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퇴사를 다루는 책들에서 말하는 불합리, 비이성, 강압적 조직문화는 없는 편이지만, 시민사회영역 특유의 무능함이 환멸난다. 나라고 뭐 얼마나 잘났겠냐만은 공부도 노력도 하지 않고 옛날옛적 치기어린 정의감과 그 시대에나 유효했던 승리의 감각만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매번 실망하고 만다. 각자 있어야 할 자리와 해야할 역할이 다른 거라도 해두자. 세상에 내맘을 딱 대변하는 책이 없을 땐 내가 써야한다는데, 언젠가는 그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으면서 할 수 있을까. 이미 여기 일기에만해도 회사욕을 얼마나 썼는데... 나는 글렀다.
이젠 이상한 것들을 봐도 화가 나지 않는다. 조금 안타깝고 슬프기는 하지만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바위를 뚫는 물방울처럼 조금씩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그렇게까지 엄청난 바위도 아니다. 깨보려고 몇 번 부딪혀 봤지만 받아주는 척, 나아지는 척, 변화하는 척, 깨지는 척 하면서 결국 상처와 땜빵을 덕지덕지 붙이고 괴상한 모습이 되어간다. 함께 노력해서 달라지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그저 시늉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진심이 좀 덜 죄책감을 느끼는 면피용으로 이용되고, 덜 꼰대스럽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줄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걸 그만두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는 척 하느라고 본질에 다가가지도 못한다. 진심을 다해 대화를 시도했던 순간들은,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지만 내가 현실을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나는 조용해졌고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회사는 순식간에 비전도 팀워크도 없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차라리 편하다. 그런데 아직 못된 공명심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조금 슬프다. 여기서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많은 일들이 이렇게나 처참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서글프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일들이 갑자기 변경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우리팀이 무능해서 이렇게밖에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될 것 같은데 나는 애정이 없고 누군가는 능력이 없고 누군가는 관심도 없고 누군가는 다 있는 척 하지만 하나도 없다.
빗소리가 기분 좋고 따뜻한 차를 곁에 두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는 밤이 좋다는 이야기로 시작한 일기가 역시나 오늘도 회사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제는 덤덤하다. 화는 더 이상 나지 않는다. 그저 무탈하게 앞으로 남은 일흔여섯 번의 출근을 해내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