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쓰는 자세한 일기
며칠 계속 악몽을 꿨다. 막 눈을 떴을 땐 무섭지만 다음 장면이 궁금하기도 하고 꿈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금세 잊어버린다. 어제는 엄마집에서 아침을 맞이했는데 늘 자던 곳이 아니라 아침에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엄마가 만들어준 찰밥으로 든든히 아침을 차려먹고 배추김치, 갓김치, 파김치, 물김치, 고추조림, 진미채볶음, 멸치볶음, 매실청, 들깨가루, 들기름, 완두콩, 서리태, 쑥차, 여름이불, 편백나무베개, 물티슈까지 한보따리 싸서 들고 집에 왔다. 엄마 옆에서 잘 땐 악몽을 꾸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요를 안 깔고 그냥 낮에 내내 깔아두던 얇은 깔개 위에서 그냥 잔다. 두꺼운 요를 깔고 위에 광목 시트를 또 깔고 광목커버를 씌운 이불을 덮으면 까슬까슬한 감촉에 기분이 좋아지는데 까는 것도 개는 것도 요즘은 너무 귀찮아졌다. 요를 깔고 잠자리를 만드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을 텐데, 으쌰, 하고 해치워버릴 기운이 잘 안 생긴다. 뭔가 재밌는 걸 하고 싶은 의욕이 가끔 조금씩 생기는데 어제는 헌 옷으로 베갯잇을 만들었다. 얼룩이 심해서 베개커버를 씌워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속옷을 입히고 커버를 씌우니 제법 마음에 든다. 겨울용이었던 극세사 커버를 벗기고 하얀색 커버를 씌웠다.
어제는 커버를 새로 끼운 베개를 베고, 엄마집에서 가져온 편백나무 베개를 안고 잤다. 엄마집에는 2019년 12월 아빠 제사 때 마지막으로 가고 1년 만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제 제삿날에도 안 와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하셔서 마음 편히 안 갔다. 그래도 서울에서 두 번 정도 엄마를 만났다. 언니들 집에 다니러 가실 때와 나의 서울 일정이 겹치면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내 냉장고에 김치와 반찬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는지가 제일 걱정이다. 내가 하루에 서너 끼를 직접 차려 먹는 걸 알면서도 그러신다. 아빠 산소에 간 지도 오래되었고 김치도 떨어졌고 한번 다녀가라는 엄마 말을 벌써 몇 번 지나친 게 마음에 걸려서 집에 다녀왔다. 아빠 산소에는 못 갔다. 오빠 부부와 엄마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제사나 명절이 아니니 언니가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안 봐도 되고, 다들 퇴근 후라 바로 헤어지니 더 좋았다.
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방으로 쏟아졌다. 참다참다 오줌이 마려워서 결국 몸을 일으키는데 일단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오면 할 일이 많다. 커튼을 걷고, 고양이 물그릇 다섯 개의 물을 새로 갈고, 고양이 화장실에서 똥과 오줌도 치워야 한다. 이불을 개고, 물을 끓인다. 전에는 아침마다 커피를 마셨는데 이제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커피를 줄였더니 이제 커피 생각이 많이 나진 않는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나면 반갑게도 똥이 마렵다. 고양이 물그릇을 비울 때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두었다가 변기 물을 내릴 때 뒤쪽 물탱크를 열어 물을 붓는다. 매번 쓰는 물을 변기 수조로 모을 수는 없지만 아침엔 조금 아낄 수 있다. 집사노릇은 귀찮다고 생략할 순 없다. 착착 몸에 익은 일들을 해치우면 잠이 깬다.
커튼이 더럽네. 작년 내내 이 커튼을 빨지 않은 게 생각났다. 여름에 얇은 커튼으로 교체하는데 아마 작년엔 괴로운 시기를 보내느라 그럴 힘이 없었을 거다.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커튼 봉을 조심스럽게 브라켓에서 빼낸다. 힘이 많이 필요하진 않지만 혼자서는 균형이 잘 맞지 않아 한쪽만 잡고 있다보면 촤르륵 고리가 쏟아질 수 있다. 한 쪽을 분리시키고 반대쪽으로 가서 다른 한 쪽과 중간 고정 부분을 분리시켜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커튼봉에서 고리를 꺼내고, 고리와 핀을 분리한 뒤 커튼에 꽂혀있는 핀을 일일이 뺐다. 큰방에 있는 커튼 2폭을 먼저 세탁기 넣었다. 여름 커튼에 핀을 꼽고 커텐봉에 꽂아놓은 고리에 끼워서 조심조심 브라켓에 커튼봉을 연결했다. 분리할 때의 역순으로 한 쪽과 중간을 먼저 고정시키고 얼른 반대쪽으로 가서 나머지 한 쪽을 고정시킨다. 핀을 일일이 꽂는 게 귀찮아서 집게형으로 된 고리를 새로 살까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 당장 가게에 가서 사오는 것도 귀찮고,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며칠 후에 도착하는 건 더 난감한 일이니 그냥 있는 걸로 그대로 했다. 핀을 꽂으면서 윗부분을 접으면 길이를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 이번엔 바닥에 끌리지 않게 짧게 만들어 달았다. 고양이털과 먼지를 덜 쓸고 다니기를 바라면서.
매일 공책에 일기를 쓰고는 있지만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는 느낌이다. 트위터에도 밥상 사진이랑 고양이 사진만 가끔 올리고 나를 표현하는 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은 지가 너무 오래전인데 오늘도 앉기 싫어서 도서관에 갔다. 대출도서 반납일이 내일이라고 문자가 왔길래 겸사겸사 몸을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입고 나갈 옷을 골랐다. 겨울 내내 입고 다니던 기모청바지 대신 춘추복으로 입을 바지를 골라야했다. 츄리닝 같은 고무줄 바지만 입고 다녀서 살이 쪘나 바지가 작아서 조금 충격이었다. 긴팔 티셔츠나 조끼 같은 간절기 웃옷을 언니한테서 잔뜩 얻어왔는데 바지도 문제라니. 헤질 때까지 입어서 덧대서 꼬맨 바지를 또 꺼내 입었다. 바지를 하나 사야하나, 살을 빼야하나.
도서관에 가서 어제의 일기를 썼다. 열람실에 책을 반납하고 앉을 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층고가 높은 로비의 공용테이블에 앉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밖을 바라보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원고 작업을 하겠다고 노트북이랑 전에 쓴 수정 전의 원고뭉치를 잔뜩 들고 갔는데 노트북으로 친구와 카톡 대화만 잠깐 했다. 휴대폰으로 편집자님께 온 메일을 읽으며 작업계획을 세우기 위한 마음에 불을 지필 준비를 했다. 학교를 마친 중학생 네 명이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체온 측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리는 익숙하게 로비 곳곳의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앗, 떠날 때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올 때 보니 내 자리에도 학생이 앉아있다.
집에 와서 볶음밥을 만들어 먹었다. 아침엔 상추, 겨자잎, 케일을 희석한 매실청 소스를 뿌리고 구운 버섯과 방울토마토를 곁들여 먹었고 점심엔 잎채소에 참기름, 간장, 멸치볶음과 밥을 넣어 섞은 뒤 라이스페이퍼로 말아서 도시락을 만들었다. 도서관에 가져가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계획에 없던 커튼 교체하느라 늦어져서 집에서 먹고 갔다. 마늘, 양파, 새송이버섯을 잘게 썰어서 듬뿍 넣고 볶았다. 몇 주 전 야채튀김을 해먹겠다고 작은 돌솥에 기름을 300미리리터쯤 부었다가 조리가 끝난 뒤 체에 걸러 작은 병에 넣어뒀었다. 그 기름을 볶음요리 할 때마다 조금씩 쓰고 있는데 부을 때마다 옆으로 흘러서 아주 불편하다. 숟가락으로 떠서도 써봤는데 역시 별로였다. 기름통을 하나 살까 하다가 이젠 튀김 같은 건 못하지 않을까 하면서 내려놓았다. (아마 에어프라이어를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볶음밥 간은 소금으로만 했는데 너무 싱거웠다. 김치를 곁들여 먹으니 괜찮았지만 얼마나 더 소금을 넣어야 하는 거야. 식후에도 자리를 뜨기 싫어서 사과도 먹고 오렌지도 먹었다.
드디어 책상 앞에 앉았다. 편집자의 메일을 다시 읽으며 앞으로 써야할 원고를 확인했다. 블로그에 쓸만한 긴 글도 쓴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운동 차원에서 이 글을 썼다. 내일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써야 할 텐데. 늦게 일어나도 꼭 써야 할 텐데. 내일도 도서관에 가야겠다. 오늘은 이불을 깔고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