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우울, 여름의 무기력

by badac

눈이 빡빡하고 어지럽다. 며칠째 컨디션이 좋지 않다. 그제는 두통약을 먹었고 어제는 답답해서 숲길로 뛰쳐나가 조금 걸었다. 오늘은 아침에 깼다가 누워있고 싶을 때까지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오후 늦게 나왔다. 하루가 다 간 것도 아닌데 오늘도 일찍 일어나지 못했네, 오늘도 알차고 성실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네, 후회와 반성을 하면서 불편한 마음이 가득이다. 다리 사이에 가지가 누워있으니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만 웃기고 재미있다.

KakaoTalk_20210522_174913017.jpg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나 요가를 하고 아침을 챙겨 먹고 도시락까지 싸고 나서도 9시도 안되는 날'이 이어질 때가 그립다. 길고 긴 하루를 건강하고 알차게 보낸 것 같고, 생산적인 일을 굳이 하지 않았다해도 매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차를 마시고,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한 시간씩 산책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집중했다. 9시나 10시에 잠들고 5시나 6시 사이에 일어나곤 했다.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좋아한다. (쓰면서도 조금 놀라운데 그 시절의 나, 그 순간의 나만을 좋아하는 거였구나) 그래서인지 그렇지 않은 시즌의 나는 늘 불완전한 상태로 여겨진다.


요즘은 11시나 12시에 잠든다. 아침엔 8시 반에 겨우 일어난다. 가지가 밥 달라고 새벽에 한두번 깨우니까 4~5시에 깨울 때 바로 지금, 지금 일어나면 성공이야!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다시 눕고 싶으니까. 다시 잠들고 싶으니까. 다시 잠들었다가 9시가 다 되어 일어나선 아이고 오늘도 일찍 못 일어났네, 하면서 느릿느릿 하루를 준비한다. 샤워를 하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한다. 아침을 챙겨 먹고 도시락을 두 개 싸서 작업실로 간다.


너무 자신을 나무라지 않으려고 한다. 하 오늘도 5시에 못 일어났네, 일찍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도 9시에 집을 나서서 10시부터 7시까지 작업실에 있으면 풀타임 근무야. 잘하고 있어. 너무 무리해서 자책하지는 말고.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인가보지. 아니 뭐 꼭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나. 지금 잘하고 있지. 괜찮아 애썼어. 하면서 나를 달래고 인정하려고는 한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긴해도. 내 속마음은, 5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요가나 달리기를 한 뒤에 개운하게 씻고 아침도 먹고 식사 준비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어제의 일기도 쓰고 9시에 출근하는 거. 그러면 나한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그러고 있으니까... 영 내가 마음에 안 차는 거지.


지난 10년간의 통계를 보건데, 4월부터 6월은 꽤 힘드니까,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선방하고 있고 잘하고 있단다. 자신에게 좀더 다정해보자.

Y_hRMqGzWEcDnhIzxIinmUkGBTw.png 2011-2020 활력그래프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 괴로운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가만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집에 누워만 있었는데 올해는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이번 주 내내 온몸에 힘이 없고 팔다리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기분, 상태, 느낌... 그런데 올해의 나는 그런 몸과 마음을 미리 알아챈 건지, 내가 알아채기 전에 본능적으로 우울과 무기력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건지 쓰러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몸이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열심히 싸우고 있었구나. 여기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줬어야 하는거네.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다. 과거의 괴로운 시절에는 차갑고 캄캄한 어둠 깊숙한 곳에서 숨쉬기 힘들 정도로 갑갑하고 두려웠는데, 요즘은 뭔가 몸이 가볍지 않고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아서 불편한 정도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기는 한데 아주 깊은 바닷속은 아니고 빛도 들어오고 아주 차갑지도 않은 깊이의 바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내키는대로 움직일 순 없지만 불쾌한 것보다는 나른한 느낌. 어 마음대로 안돼네. 그럴 땐 물에 몸을 맡겨야 하나. 다이빙을 할 때처럼 힘을 빼면 되려나 하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이 낯선 감각을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그랬구나. 힘들게 버티고 있었구나.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애썼다, 장하다 되뇌곤 했는데 진짜 진짜였어. 정말 애쓰고 있었구나. 더 가라앉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면 더 깊이 가라앉을지 모르니까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습관적으로라도 잘했다, 장하다, 애썼다는 말을 해줬던 것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왜 이것밖에 안될까, 이상하다.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일단 말이라도. 표현이라도. 애썼다. 장하다. 잘했다. 너무 고생하는구나. 그렇게 말해버릇했으니 오늘 이렇게 그 노고를 알아주는 순간도 온 것 같다.

KakaoTalk_20210522_174912572.jpg
KakaoTalk_20210522_174913264.jpg

오늘은 9시 반에 일어나서 아침을 챙겨 먹고, 볶음밥 도시락을 두 개 만들어뒀었다. 우울하고 서글퍼도 먹는 덴 진심이니까 채식만두 10개를 구워서 샐러드랑 같이 먹었다. 그리고나서 따지지말고 샤워하고 나갈 준비를 했으면 또 그런 하루가 그냥 이어졌을 텐데, 나가기 싫어서 그냥 다시 누워버렸다. 집 상태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은데 빨래 걷어놓은 걸 개기 귀찮아서 의자 위에 산을 쌓아뒀다. 이부자리도 한번 탈탈 털고 대청소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기운이 없어서 겨우겨우 집을 몇조각으로 나누어서 하루는 이조각, 하루는 이조각씩 쓸고 닦았다. (이것도 얼마나 지금의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나. 진짜 현명하고 훌륭하네! 잘했어 진짜)


대청소를 할까, 아니야 너무 힘들고 귀찮고 하기 싫어, 그냥 누워 있을래. 하면서 휴대폰 붙들고 트위터나 하고 놀다가 스르륵 잠들었다가 다시 깼다가 하기를 몇 시간. 머리는 계속 아프고 몸에 힘은 없다. 그런데 바깥은 날씨도 좋아보이네. 그냥 한번 나가서 볕이나 쬘까, 하고 집앞 벤치에 좀 앉아있었다. 그러니까 기운이 좀 나더라. 기분도 나아지고. 그래서 힘을 끌어모아 다음주의 도시락용으로 된장찌개를 만들었다. 몸에 기운이 돌기 시작하니 어, 그럼 작업실에 가볼까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때 시간 3시 반.


지금 가서 몇시까지 뭐라도 할 수 있을까? 요즘 일도 잘 안되는데 기름값이나 아끼게 집에 그냥 있을까, 가서 분명 일도 안할 건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가방에 담고 있었다. 아까 싸놓은 도시락 두개를 가서 먹어야지. 일을 안해도 종일 집에 있으면 또 기분이 쳐질테니까 나가도 좋을 거 같아. 주말에는 옆방 사람들이 안 나오니까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좋단 말이지. 그래서 나왔다.


40분을 운전해서 작업실에 왔고, 오자마자 도시락을 하나 까먹고, 오늘의 기분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몇몇 친구가 좋아요를 눌러줬다. 그게 뭐라고 또 그 마음이 고마워서 가만히 앉아있다보니 긴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오늘 하루 알차네. 충분히. 나의 애씀을 내가 진심으로 알아줘서 더 좋은 날이다.


KakaoTalk_20210522_17492592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토요일 밤 12시, 집에서 혼자 머리칼 자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