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같은 아침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거지

by badac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자기 검열을 밀쳐내고, 부러 소리내어 애썼다 잘했다 말했던 어제를 보내고 기분 좋게 잠들었는데 악몽을 꿨다. 고어 장르물이어서 사방에 피가 튀고 난투극을 벌이다 새벽에 잠이 깼는데 어디선가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와 다시 잠들지 못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디가 긁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한밤중이라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기를 느끼며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다. 물소리인가 싶어서 싱크대 하부장에 귀를 대고 가만히 있었다. 멀찍이 나를 지켜보는 가지가 놀랐을까 걱정이다. 냉장고는 갑자기 위잉 돌다가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를 내고 여전히 어딘가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근원을 찾는 건 포기하고 다시 눕기로 한다. 서늘한 느낌이 싫어서 보일러를 켰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시계를 보니 3시 반이다. 집안에 온기가 도니 다행이다. 다시 잠들면 좋으련만 점점 정신이 또렸해진다. 뒤척이다 보니 4시가 넘었다. 4시, 4시라면 아침이라고 볼 수 있지. 한창 명상하던 시절에는 4시에 일어나 두 시간씩 앉아있었으니까. 정신이 점점 맑아지길래 벌떡 일어나 어제 불려둔 현미쌀로 밥을 안쳤다. 일어난 자리를 돌아보니 바로 눈 앞에 개키지 않은 빨래 더미를 쌓아둔 의자가 보인다. 눈 감고 잠들기 직전까지 이런 모습을 보면 꿈자리가 뒤숭숭할만도 하겠다. 오늘은 꼭 빨래를 정리해야겠구나.


날이 밝아지면 산책을 나가야겠다. 마음처럼 아침에 일어나지지 않아서 속상하다고, 그렇지만 너무 다그치진 않겠다고 내 마음을 그냥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하면서 어르고 달래고 추켜세우고 애를 썼는데 다음날 아침 거짓말처럼 이렇게 새벽에 눈이 떠질 일이야. 이제 됐다~ 하고 도인처럼 자연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어쨌뜬 결과적으로는 간절히 원하던 그런 아침을 맞이하게 됐다. 신기한 일이다. 왜 악몽을 꿨을까, 결과적으로 어제 3시간 정도밖에 못 잔건데 오늘 괜찮으려나 하는 걱정도 들지만 오늘 일찍 잠들면 될 것이다. 내내 원했던 게 이런 리셋이었다. 하루 정도 아주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들면 자연스럽게 다시 생활리듬이 돌아올 것 같아서.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지만, 오늘 이렇게 새벽에 눈이 떠졌으니 내일과 모레를 지켜볼 일이다.


5시에 밥을 해서 채소비빔밥을 먹었다. 새송이버섯을 오븐에 구워 기름소금에 찍어 먹으니 쫄깃쫄깃한 게 전복 같은 맛이 났다. 기분 좋은 아침. 도시락통 두 개에 밥을 담아두고 산책길에 나섰다. 해는 5시 20분에 뜬다고 나오는데 날은 벌써 밝았다. 혼밥생활자의 책장을 들으며 걷기 시작한다. 1시간 30분짜리 에피소드면 충분하겠지.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본다.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지 않은 이른 아침이라 꽃, 풀, 바람에서 자연의 냄새가 난다. 기분 좋게 강둑과 마을길을 걷는다. 약간 길을 헤맨 덕에 집에 도착하기 전에 방송이 끝나버렸다. 아침부터 제법 오래 걸었네. 좋은 시작이다.



샤워하고, 빨래를 돌리고, 작두콩차를 끓여마시며 어제의 일기를 썼다. 때마침 업무차 연락이 와서 다음주의미팅일정도 잡았다. 아마 그분도 프리랜서라 주말인 걸 깜빡하신 걸까, 일요일 아침 9시에 카톡이라니. 그럴일이 있었겠지 하고 너그럽게 넘어갔다. 중간에 일처리를 제대로 안 해준 담당자에게는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화를 내봤자 소용없다, 잊어라!


어제 끓여둔 된장찌개를 챙겨서 도시락 가방을 들고 작업실로 출근. 날도 좋다. 거짓말 같은 아침, 스피커에서 나올 법한 새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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