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20
완주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다. 웃풍이 센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창문에 비닐과 뽁뽁이를 붙이고 두터운 극세사 커튼을 쳤는데도 퍽 춥다. 탁자 아래에 온풍기를 넣어 코타츠를 만들고 방한 텐트도 쳤다. 그럭저럭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겨울을 보내는 중이었다.
1월 하순, 엄청난 추위가 찾아왔다. 15년 만의 한파란다. 서울은 영하 18도까지 떨어졌고 완주도 영하 13도에 대설특보가 내려졌다. 수도가 얼어버렸다. 보일러를 틀고 물을 틀어 놓았는데도 소용없었다. 친구네로 피신해 며칠을 났고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얼어붙은 수도관을 녹이기 위해 3일 동안 수도계량기 앞에서 갖은 애를 써주셨다. 오늘은 집에 갈 수 있으려나 수도의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를 할 때면 그쪽도 나도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저기, 저희가 종일 녹였는데 잘 안되네요.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딴 데서 자고 오면 되니까요. 그나저나 추운데 너무 고생이 많으시네요”
“녹았어요! 아직 싱크대 쪽 찬물은 안 나오지만 따뜻한 물이랑 화장실 물은 나옵니다. 보일러도 돌아갑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출입문 옆 수도계량기함 안에 헌 옷을 더 채워넣고 입구를 꽁꽁 여몄다. 며칠 집을 비우는 날에는 밤에 보일러가 가끔 돌아가게 맞춰두고 싱크대와 화장실 수도꼭지는 열어뒀다. 적당한 추위에는 똑똑 물이 떨어지게, 좀 추운 날은 졸졸졸 흐르게, 많이 추운 날은 콸콸콸 쏟아지게.
긴장이 풀려서일까 아님 추운 집으로 돌아와서일까. 날은 풀렸는데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몸이 으슬으슬하고 목이 칼칼하더니 코가 막히고 줄줄 콧물이 나온다. 몸에 힘이 없어서 행동이 굼뜨다. 두어 시간 일찍 퇴근해서 몸을 누이니 여전히 기력은 없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조금 심심한 것 같아 친구에게 문병오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그이는 딸기를 사들고 잠깐 들렀다. 함께 비타민씨를 섭취하고 ‘보기와 달리 은근히 약골’인 내 신체조건과 건강상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친구가 돌아간 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어제 끓여놓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데워 저녁을 먹으니 땀이 난다. 약을 챙겨먹고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 뜨끈한 바닥에 눕는다.
‘이 정도면 됐다. 찾아와 줄 친구가 있고, 약과 고깃국을 사 먹을 돈이 있고, 이 한 몸 누일 곳이 있다.’
아플 때 더 이상 엄마 생각은 나지 않는다. 아플 때 어떻게 해야할지, 아파도 잊지 말아야할 일은 무엇인지 안다. 어른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무조건 헌신적인 ‘엄마’를 소환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다른 이의 보살핌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른은 함께 서로를 살뜰히 돌봐야 한다.
건강할 때 생존체력을 길러 나를 돌보고 도움이 필요한 주변 사람도 잘 돌보기. 더해 수도가 얼지 않게, 웃풍이 들지 않게 배운대로 집을 단도리하는 게 겨울을 나는 내 비법이다. 캄캄한 밤이 오늘은 외롭지 않다. 지금 실컷 앓고 땀을 빼야 내일이 가뿐해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