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완주행보

제일시련_第一試鍊

완주행보_完州行步21

by badac

이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완주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7개월에 들어선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마그내 다리 옆 둑방길로 걸어서 회사에 갔다. 길가에 핀 코스모스 구경하랴, 강에 노니는 오리 쳐다보랴, 동네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에게 인사하랴 느릿느릿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서울에서 만원 지하철에 몸을 구겨넣고 실려가던 때와 비교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매일 걸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도시에서와 전혀 다른 시간으로 살았다. 보통 9시에 자고 5시도 되기 전에 일어났다. 날이 밝아오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드는 식물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가끔 쓸쓸했지만 전반적으로 행복하고 감당할만큼 외롭고 괴로우면서도 건강하다 말할 수 있는 날들이었다. 일찍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집안일도 하고, 장에 내다 팔 향초나 치약도 만들었다. 공을 들여 커피를 내려마시고 일기도 쓰고 책도 읽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도 했다. 아침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시간은 마음을 다해 행복하게 썼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은 도시에서와 다르지 않았지만 야근도 없고 업무량도 적당해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적당히 저녁시간을 보내면 다시 그 아름다운 아침이 오니까 아주 가끔 찾아오는 쓸쓸함도 견딜 만 했다. 그렇게 눈부신 가을날을 보냈다. 그러다 밤이 점점 길어지는 겨울이 왔다. 자연스레 눈은 늦게 떠졌고 때마침 일거리도 많아져 잠드는 시간도 늦어졌다.


언제부터인지 8시 30분이 되어도 몸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피곤해졌다. 자동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백번도 더 생각했다. 집에서 밥 한 끼 해먹은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일기는 열흘도 넘게 밀렸다. 피할 수 없던 야근을 몇 번하고 주말마다 다른 지역으로 돌아다니느라 제대로 못 쉬었더니 서울에서 직장 다닐 때처럼 피로가 쌓여버렸다. 2주 만이었나,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들어가 쉴 수 있던 날이 하루 생겼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잠자리에 바로 누웠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너무 오랜만이라 눈물이 나고 말았다. 불을 끄고 한참을 울었다.


날이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순간을 오도카니 기다리며 지켜보던 시간,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천천히 만들어 예쁘게 차려내고 맛있게 먹으면서 깔깔거리던 기쁨, 강물이 흐르면서 자아내는 물결무늬를 보며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순간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누워서도 언제까지 뭘 해야하는지 누굴 만나야하는지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더 좋은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료를 찾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나는 이전 서울에서의 모습과 꼭 같다. 지난 6개월은 그렇게 산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많아서 시골의 직장인이란 도시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왜 이렇게 다시 바빠져 버렸을까. 아마도 도시생활의 습성이 되살아났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어딘가에 가고, 무엇인가 계속 하고 있어야 살아있다는 안심이 되던 때처럼 새로운 일을 벌이고 말았다. 지금을 살아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는데 무엇이 모자라 새로운 일을 벌였을까.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백수가 친구들 만나느라 바쁘고, 농사 지으며 느리게 살고 싶다고 내려온 귀농인들이 각종 모임에 다니느라 바쁜 것도 비슷한 처지다. 너무 바쁘게 살아내고 당연히 피곤에 지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바쁘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귀농귀촌인들의 모임, 을 꾸리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으니 사람이란 정말 변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평화로운 6개월을 살았으니 재미있는 6개월을 살겠다는 마음을 먹은 찰나, 때마침 회사에선 적응하는 6개월을 보냈으니 열심히 일해야 하는 6개월이 기다리고 있다. 공교롭게도 잡고 싶은 인연은 동시에 오고 해야할 일은 몰리기 마련이다. 회사는 계속 바빠질 테고 일이 끝날 때까진 어찌됐든 버텨야 한다.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귀촌인 첫 번째 시련을 잘 지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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