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늦잠을 잤다. 지하철 같은 칸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이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잠으로 도피한 건 아니고, 몇 주째인지 몇 달째인지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날이 이어진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느라 깼을 때 휴대폰을 슬쩍 봤다가 일부러 개표결과를 확인하지 않았다. 어떤 결과든 감당할 기운이 없었다.
10시가 다 됐을 무렵 겨우 일어났고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했다. 어쨌든 지금 할 일을 해야했으니 어떤 기분인지는 헤아리지 않기로 한다. 다섯 군데에 놓여이는 가지 물그릇을 새 물로 갈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뜨거운 물을 한잔 마셨다. 친구들과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의 재고물량을 확인했다. 어제 읽다만 소설책을 마저 읽었던가, 어제밤에 다 읽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트위터에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읽다 말다 읽다 말다 어제 엄마가 보내주신 김치찜을 데워 먹었다. 모카 포트에 커피도 뽑아 마셨다. 밥을 먹을 때는 평소처럼 짧은 유튜브 클립을 봤다. 문명특급에 올림픽 대표팀의 프로필 사진을 찍은 분들의 인터뷰 영상이 올라와있었다.
오늘은 10일, 닷새에 한번씩 스스로 만들어놓은 마감 날이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써야하나 잠깐 생각하다가 고민을 멈춘다. 전혀 감도 오지 않는다. 며칠 전 만난 친구가 올해는 어떤 계획이 있느냐,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냐, 어떻게 살고 싶냐 따위를 물었다. 작가님 작가님 하는 인사가 민망했던 시기를 지나, 서너 권의 책을 냈고 앞으로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은 확실하므로 내가 작가인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는 작가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뭘 쓰고 싶은지, 어떤 책을 내고 싶은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 뭐에 대해 써야할지조차도. 쓰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작가라는 말에 부끄러운 까닭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서다. 청탁받은 원고는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므로 어렵긴해도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월간이든 주간이든 마감도 잘 지킨다. 스스로 정한 마감 약속도 잘 지킨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쓸 게 없고 할 일 없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 마음에 대해 쓴다.
작년에는 꼭 끝내야하는 단행본 원고가 둘이나 있어서 어떻게든 마음을 몰고 갔었는데 올해는 꼭 그렇지는 않다. 회사 다닐 때처럼 해야하는 업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일, 하기로 약속한 일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어쩔 줄 몰라하며 보낸다. 시간은 잘만 흐르니 금방 오후 두 세시. 그쯤 되면 이제 하루가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후 세 시, 도서관으로 가서 지난주에 빌려온 책들을 반납하고 새로 빌려올 책을 골랐다. 신간 코너를 둘러보며 제목이 마음에 드는 에세이, 소설을 집고 만화 코너로 옮겨 같은 방법으로 만화책을 집었다. 5권까지 빌릴 수 있는데 15권이나 골랐다.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읽는다. 6시에 도서관을 닫으니 5시 반쯤 일어선다. 독서노트에 적으려고 오늘 읽은 책의 제목이 보이게 쌓인 책의 등을 찍고 나머지 10권 중에서 대출할 책을 다시 한 번 고른다.
할 일이 없을 땐 귀에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집 근처 만경강을 걷곤 했는데 나가서 걸은 지도 한참 됐다. 나가서 좀 걷고 햇빛이라도 받으면 좋기는 할텐데 그냥 지금은 좀 천천히 느긋하게 몸과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하루에 한번 나가서 꼭 걸어야지! 아침에 요가도 10분씩 해야지! 과식은 하지 말고 고기도 줄여야지! 그림도 그리고 영어공부도 해야지! 그런 다짐을 2월 1일에 하긴 했는데 꼭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나 스트레스는 없다. 그냥 조금 편한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지 않나, 쓰고 싶은 건 뭔지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늦은 오후에라도 도서관에 만화책 보고 소설책 빌리러는 가고 싶다.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날이 또 얼마나 되겠어. 하고 싶은 걸 느긋하게 하다보면 다른 생각이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짜피 뭐든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상담선생님은 스스로를 믿고 기다리는 힘이 좀 생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런가봐, 조금은 나를 전보다는 믿고 있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