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셀프 잔소리-결국 다짐이 되어버린.

by badac

가까운 분이 밥 한 끼 사주시면서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으시기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엉망진창이라고 대답했다. 장 볼 때도 뭘 사야할지 모르겠고 끼니 때가 되어도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다. 그렇다고 절대 끼니를 거르지는 않는다.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푼다는 자각은 없지만 그냥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뭔가를 먹는다. 냉동실에 있는 떡을 구워먹거나, 조미김을 먹거나, 부침가루에 대파를 썰어 넣고 파전을 해먹는다. 1분 거리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삼각김밥, 컵라면을 사먹기도 한다. 썩 맛있지는 않은데 포만감이라도 느끼고 싶어 배가 부를 때까지 많이 먹는다. 맛있게 기분 좋게 즐겁게 먹진 않았지만 배가 가득차 터질듯한 기분을 느낀다. 무엇이 됐든 전과 다른, 어떤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다.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지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멍한 눈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갓 튀긴 핫도그를 먹고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머쓱해졌던 기억이 난다. 야, 참 나 별 거 없네. 맛있는 걸 먹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구나.


미친듯이 바쁘다고 생각할 때에도 시간을 들여 갓지은 밥과 찌개를 끓여 먹고, 공허한 마음 탓에 자극적인 음식이 생각나도 과자나 라면보다는 조금 더 몸에 좋은 통밀빵에 쨈을 발라 먹는 사람이 나였다. 먹는 데 진심, 많은 순간 지금 딱 먹고 싶은 게 있었다. 선배들이 밥을 많이 사주던 신입생/초년생 시절에는 언제나 먹고 싶은 메뉴를 정해가서 밥 사주기 편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내가! 그랬던 내가! 먹고 싶은 게 없다니! 먹어서 기분 좋아지는 게 없다니! 늙으면 입맛도 변하고 맛있는 게 점점 없어진다더니 정말 그런 건가? 우울한 마음이 극심해서 정말 입맛이 떨어진 건가, 아니 떨어지진 않았으니 변한 건가. 낡은 건가.


세수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누워서 휴대폰만 붙들고 있다가 지루해지면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을 사온다. 집에서 물 끓이기도 귀찮으니 편의점에서 물을 부어서 집까지 들고 온다. 다시 집에 들어와 예능 프로그램을 몇개 보다가 지겨워지면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와서 해치운다. 배가 더부룩하다. 과자를 너무 먹었다 싶으면 지난 주에 야심차게 장을 봐온 양배추를 썰어서 고추장에도 찍어 먹고, 마요네즈에도 찍어먹는다. 아 내가 원하던 맛이 이 맛이 아니야. 그렇지만 먹기를 멈추지 않는다. 배가 몹시 불러질때까지 계속한다.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아 피곤하고 나른하다. 지금 바로 잠들면 당연히 속에 좋을 리가 있냐. 아침에 늦게 일어나니 밤이 늦도록 잠들지도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뭔가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휴대폰을 붙들고 트위터를 두 시간째 새로고침하고 지겨우면 유튜브나 뒤적뒤적. 으아악 심심해. 잠도 안와. 자고 일어나도 찌뿌둥해.


내가 엄마라면 등짝을 후려치고 저거 저거 어디다 쓰냐며 혀를 끌끌 찰 것 같다. 야 나가서 산책이라도 좀 해. 하루종일 과자랑 라면 같은 거나 먹고 뭐 한다고 이불 속에서 휴대폰만 붙들고 있냐. 으이그. 할 일이 그렇게 없냐. 나가서 친구도 좀 만나고 일도 하고. 방바닥 좀 봐라,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뭐라도 좀 해라, 이 화상.


책이라도 좀 읽은 날에는 그래도 뭔가 한 기분이 들지만, 그도 저도 아닌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보낸 느낌이 든다. 사람도 안 만나고, 삶의 재미나 보람이나 의미도 못 느끼고, 그 어떤 자극이나 변화나 사건도 없고, 그러면 살아 있는 거나 죽은 거나 다름 없지 않나, 까지 생각이 이어지고 만다.


아니,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까지 해. 그런 날도 그런 순간도 있는 거지. 며칠 집에 쳐박혀서 누워만 있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도 아니고, 고작 그래봤자 하루나 이틀 정도 그럴거면서. 정작 또 좀이 쑤셔서 도서관이라도 나갈 거면서. 뭐 그렇게 아무 것도 안 했다고 자신을 타박하나. 모든 순간 순간이 의미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지.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야 설마? 그러고 제정신으로 어떻게 살아? 기계처럼 모든 순간을 계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면 살거야? 기계도 고장나는데 하물며 인간이.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도 있고, 휴식도 필요하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순간도 있고,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순간도 있고,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흙탕물을 뒤집어 쓰는 순간도 있어. 너무 높은 이상을 계획으로 잡아놓고 늘 좌절하며 열패감을 느끼는 건 아닙니까? 좀 긍정적인 생각을 하세요.


부정적인 기억이 더 오래 영향을 미치긴 할테지만, 그럴 수록 더 적극적으로 내가 가진 장점, 내게 마음을 내어주는 소중한 사람들,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들을 생각하렴. 엉망진창으로 먹고 살고 있는 나날이 계속 되니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래도 다행히 밥 먹자고 불러주는 사람도 있고, 외롭고 심심하니 놀자고 찾아가면 놀아주는 사람도 있고, 이럴 때를 대비한 건 아니지만 내일엔 과거의 내가 잡아 놓은 약속도 있다. 잘했네 잘했어.


하루를 버렸다는 죄책감이나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마음을 밀어낼 것. 도대체 누가 그런 잔소리를 하냐? 자기는 얼마나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 내가 자라온, 둘러싸인 환경에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그렇게 못해 다들.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으면 된다는 걸 누가 모르냐, 알면서도 못하는 게 인간이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거지. 많은 평범한 인간들이 의지가 몸에 나쁜 걸 알면서도 야식을 먹고, 도저히 아파서 움직일 수 없는 순간에야 울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냥 그런 거야. 스스로를 너무 미워하거나 벌하지 말 것. 차라리 가여워하며 잘 돌봐줘라. 기운이 없어서 못하겠으면 남한테 신세도 지고,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그래라.


진짜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쓴, 오늘의 엉망진창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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