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제과
집에 안 간 건 내 선택이긴 한데 심심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우울해질 것 같아서 동네 산책을 나섰다가 보문산 고촉사까지 다녀왔다. 꽤 많이 걸었고, 숲길,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확 트인 전망, 구름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봤다. 명절에 안 간 게 미안해서 그랬는지,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고 효도 한 건 했다고 기뻐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문오거리에서 귀여운 제과점을 발견하고 다음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_2022년 9월 10일 토요일 추석 연휴 둘째 날의 일기 (마음 온도 +1)
문 닫힌 극동제과 앞에 확대해 붙여 놓은 신문에서 1대 창업주 부부와 2대 사장인 아들이 환하게 웃는다. 오래된 가게에는 늘 마음이 간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랬나 명절을 혼자 보내는 게 적적해서 그랬나 모부와 함께 대를 이어 장사하는 집이라니 더 좋아보였다. (남의 일이라 말이 쉽다. 엄마와 함께 장사를 잘할 자신은 없다.)
극동제과에서 처음 빵을 산 날은 그로부터 1년도 훨씬 지난 2023년 1월 30일이다. 반찬호떡을 사 먹으러 갔다가 이른 반죽 품절로 시무룩하게 돌아오던 날 예전부터 눈여겨 본 극동제과에 드디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월 6일에는 맘모스빵과 양파빵을 커피와 함께 먹으면서 소탐대전 반찬식당 편을 썼다. 설 연휴가 시작되는 첫째 날에 한 번 더 가서 크랜베리쌀빵 계란빵을 샀고, 방금 이 원고를 쓰면서 먹으려고 단호박깨찰방을 사 왔다. 이렇게 정확한 날짜를 써야 속이 후련하다. 처음 극동제과를 발견한 날이 명절 연휴였고 날이 쌀쌀했던 것 같아서 2023년 설이라고 생각하고, 작년의 업무일지, 휴대전화 사진첩, 트위터를 뒤져보았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원고를 쓰려고 도서관에 간 상태였는데 나란 사람은 일기장을 뒤져서라도 정확한 날짜를 알아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2023년 설날이 언제였는지 검색해서 그 날짜의 일기장을 꺼내보았는데 보문산에 갔다는 말이 없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 중요한 일을 일기에 적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분명 명절 연휴였는데. 혹시 추석인가? 수십 권의 일기장 중에 그날의 일기를 찾아보았다. 그럼 그렇지. 나는 엑셀을 이용해서 업무일지를 쓰는데, 모임이나 원고 마감 일정 외에도 좋아하는 장소나 인상적인 음식을 기록해 둔다. 그렇게 2022년의 업무일지에도 떡하니 보문산 등반이 적혀있었다.
처음 극동제과에 들어간 날은 반찬호떡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집까지 갈 힘이 없었기 때문에 길에서 생도너츠를 먹으면서 집에 왔다. 달달함이 입을 거쳐 뇌에 도착한 순간, 방금 갔던 극동제과가 얼마나 아름답고 귀여웠는지에 대한 감동도 동시에 도착했다. 어릴 적에나 보던 구리볼(상투과자), 바나나빵, 카스텔라, 분식점에서 처음 먹어본 햄버거랑 똑같이 포장된 햄버거, 맘모스빵, 크림빵이 귀여운 빵 봉지에 담겨있었다. 비닐 봉지에는 제과점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는데 빵가루가 잔뜩 묻고 미끌미끌한 비닐포장을 씻어서 보관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엔 너무 계획 없이 지저분하게 빵을 먹었으니 다음에 가서 한 번 더 빵을 사 먹고 빵 봉지를 잘 보관해야지. 정말로 다음번 빵 봉지는 깨끗하게 챙겼다. 그림이 잘 보이라고 흰 종이도 안에 넣었다.
빵집의 기본은 빵맛인데, 맛있다는 이야기는 안 하고 귀여운 외모와 정다운 스타일만 강조하니 혹시 맛이 별로라서 슬슬 시간을 끄는 건가 싶겠지만 아니다. 맛있다. 단팥빵과 크랜베리쌀빵이 특히 맛있었다. 국진이빵, 공갈빵, 바나나빵은 옛날 생각이 나서 오래된 손님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1987년에 개업에 한 자리에서 4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고 영업하고 있는 가게가 맛이 없기는 쉽지 않다. 그 세월 자체가 매력이고 맛이다. 내부에는 87년 개업식날 사진을 비롯해 옛 사진이 많이 붙어있는데 무슨 사진이냐 물어보진 못했다.
때마침 중구청에서 맛집 소개차 취재 나온 분에게 여자 사장님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시는 걸 들었다. (이건 또 어떻게 알았냐, 다음날 검색해보니 중구청 블로그에 내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사진이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골손님이 왜 오늘은 혼자 계세요? 라고 묻는 말에 아들은 쉬다가 좀 이따 나와요 하시는 대답을 들어서 의도치 않게 3인의 근무시간도 대략 파악해 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오후에 방문했을 땐 2대 남자 사장님이, 두 번째 3시 이전에 갔을 땐 1대 여자 사장님이, 며칠 전 저녁에 갔을 땐 1대 남자 사장님이 빵을 만들고 계셨다.
몇 년전에 리모델링해서 내부에 테이블 좌석을 만드셨다고 한다. 아주 복잡하지도 않고 편안한 분위기라 일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아메리카노 3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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