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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May 14. 2024

큰물이 그리울 때

대청호 거북바위와 황새바위

대전으로 이사 오라던 친구 부엉의 권유에 ‘대전엔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대답했다. 부산처럼 바다가 있길 하니, 지리산이나 설악산 같은 그럴듯한 산이 있길 하니. 제주에는 둘 다 있는데 대전에는 하나도 없잖니.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언제든 어디로든 기차 타고 떠날 수 있으니까 없어도 있는 것과 엇비슷하다. 


몇 년에 결쳐 대전을 드나들면서 보문산 사정공원을 걷고, 테미공원에서 벚꽃을 봤다. 대동 하늘공원에서 야경을 구경하고 성심당 빵을 사 먹었다. 좋은 날이었다. 그러다 점점 대전을 사랑하게 되어 이사를 결정한 건 아니지만 서울살이하다가 완주군으로 귀촌하고 다시 어딘가로 삶터를 옮길 생각을 하던 내 입장에서는 서울 가깝고 전국 어느 지역으로 가기도 좋은 교통의 요충지인 게 가장 좋았다.  도시의 편의와 화려함이 그리운데 서울만큼 과하지는 않기를 바라니 적당한 규모의 광역시인 대전이 괜찮았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함, 별것 없는 어정쩡함, 경유지나 중간 지대의 무난함이 대전의 특징인 것도 같았다.


여행으로 며칠 지내러 가면 집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사실이 행복하고, 한 달에서 일 년 살다 보면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 수십 년을 살면 타지인으로서 지역의 문화나 정체성을 체감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3년 차 대전시민인 나는 서울이나 완주나 부산이나 대구나 사람 사는 데가 다 비슷하지 싶다. 서대전 공원 잔디밭에 앉아 있을 때, 한밭수목원을 걸을 때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을 보면 여기가 도심 한복판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산과 강,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도시에 살면서 가까운 곳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이런 공원도 재미있고 좋다. 사람 한 명 만나지 않는 오지 산골 마을을 동경하지만 십만 인구의 소도시 읍내에서도 외롭다고 하던 나한테는 이 정도의 혼잡함이 어울리는 것도 같다.


바다가 그리워질 땐 ‘대전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를 찾아 보령에 갔다. 독산해수욕장, 천리포해수욕장에 가고 시간이 없을 땐 한밭수영장에 몸을 담갔다. 경하온천, 계룡스파텔도 좋아한다. 온천이 모여 있는 봉명동에는 무료 족욕 체험장도 있어서 번쩍이는 건물과 인파를 구경하며 발을 담그기도 했다. 그러고도 물이 그리울 땐, 대전천변을 자전거로 달렸다. 갑천에서 다양한 수상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모양인데 아직 가보진 못했다. 그리고 대망의 대청호! 대청호는 대전 대덕구와 동구, 충북 보은군과 옥천군, 청주시 사이에 건설된 다목적 인공 저수지다. 대청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 호수라는 사실은 글 쓰려고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1975년부터 1980년까지 5년 동안 86개 마을이 수몰되었고 8,600명이 실향민이 되었다고 한다. 수몰 마을 기록화, 수몰민 생활사 채록 등의 사업을 각 지자체에서 조금씩 하는 듯하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이 호수가 마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거 같다. 


대청호 방문 후기 중에 바다처럼 찰랑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바다가 그리워서 대청호에 찾아가진 않는다. 바다는 바다, 호수는 호수다. 워낙 넓어서 한두 번 방문으로 대청호에 다녀왔다고 할 수 있을지 민망하지만, 살짝 가까이만 가도 충분히 신비한 경험이었다. 큰물은 두렵고 아름답다. 산 아래 큰물이라 더욱 아름다웠다. 시간과 체력이 생긴다면 조금씩 대청호 500리길 둘레를 걸어봐도 좋겠다.


내가 찾아간 곳은 거북 바위와 황새 바위 전망대다. 너무 넓고 갈 데가 많아서 고르기 어려울 땐 이름을 듣고 결정하곤 한다. 주차장에서 거북바위까지는 아주 금방이고, 갈림길로 다시 걸어 나와 조금 숲길을 걸으면 힘들어지기 전에 황새바위 전망대에 도착한다. 거북바위에서 고요한 물을 바라보면서 한참 쉬었다. 물이 많이 차서 바위는 봐도 거북이로 보이지 않았고 중간에 안내된 큐알코드를 찍어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전설을 찾아보았다. 육지 구경을 나온 거북이가 동네의 효자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어머니를 고려장 하러 산에 갔다가 땅에서 솥단지를 발견했고 도저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그 솥이 무엇이든 두 개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솥이어서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거북이는 마을에 남아 효를 배우다가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데… 차라리 솥에 거북이가 들어가서 두 마리가 되었다는 게 더 재미있을 것도 같다. 거북이 찍고 황새 만나러 이동. 황새 바위는 더더욱 황새로 보이지 않는다. 혹시 황새가 쉬었다 가는 장소였으려나, 역시 또 찾아보니 수몰 전 마을 아래쪽에서 보면 황새처럼 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호수 시점,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나 황새로 보이겠지. 넓게 트인 전망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고독한 벤치가 멋스럽다. 가만히 물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겠다. 집에서 꽤 멀어서 자주 오진 못하겠지만 좋은 장소를 알게 되어 반갑다. 바다보다는 가까우니까 큰물이 그리운 날엔 찾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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