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인의 기본은 일간, 월간, 연간 가계부 작성
나는 세 개의 가계부를 쓴다. 각 건의 수입과 지출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휴대전화로 바로 입력하는 웹 기반 후잉 가계부, 월말에 항목별 합계와 수입/지출 총액을 손 글씨로 쓰는 가계부 공책, 공책과 같은 내용이지만 연도별 시트를 만들어 추이를 살피며 비교하기 좋도록 작성하는 엑셀 가계부가 그것이다. 후잉 가계부에서도 합계나 구간별 항목별 그래프 보기 기능이 있지만 내가 만든 엑셀의 표가 보기 편하다. 월평균과 연도별 총계도 한눈에 볼 수 있어 좋다.
공책과 엑셀 가계부는 2015년 10월부터 시작된다. 그전에도 가계부를 썼지만 차곡차곡 쌓고 모아둔 건 그때부터다. 다이어리에 조금 쓰다가 해가 바뀌면 그냥 버렸고, 일기장에 그때그때 메모해서 예산을 세우거나 지출 관리를 하는 정도였다. 내게 맞는 어플을 이것저것 써보다가 머니러버-비용 추적기를 이용했다. 무료 어플이라 그랬는지 이용법을 잘 몰라 그랬는지 데이터를 한번 몽땅 날렸다. 그 후엔 비용이 들더라도 안정적인 플랫폼이 나을 것 같아 2021년부터 후잉 가계부를 사용한다. (월 3,900원) 데이터는 사라졌지만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는 남았다. 아날로그 형태의 손 글씨 가계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공책도 세월과 비바람에 훼손되겠지만. 그래서 가끔 엑셀 가계부를 출력해 둔다.)
모든 표의 핵심은 카테고리를 어떻게 만들고 분류하느냐인데 가계부는 특히 그렇다. 친구와 밥을 먹었을 때 외식비에 포함할지, 친교비로 포함할지 결정해야 한다. 어디다 돈을 쓰는지 대충은 알고 있으니 경상비, 즉 상대적으로 고정적인 비용과 용돈에 해당하는 생활비로 나누고 세부 항목을 만들었다. 2015년의 가계부에 이미 이런 분류를 쓰고 있는 걸 보면 그 전에 카테고리를 정하는 힘든 일은 이미 끝낸 모양이다. 처음에는 모든 지출을 쭉 나열하고 그걸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면 쉽다. 친목도모비나 사회생활비, 품위유지비 등 어려운 말로 쓰지 않고 직관적으로 ‘친구’라고만 적었다. 주거/통신비, 회비/세금, 식비, 교통비가 고정비에 해당한다. 나머지는 다 생활비인데 문화/공부, 친구, 건강/의료, 특별/여가, 살림, 기타로 구성된다. 피복비, 경조사비 등 자주 발생하지 않는 항목은 따로 분류하지 않는다. 살림이라는 항목에 통으로 살림살이에 필요한 모든 걸 넣는다. 세부로 생필품과 사무용품이라고 나누었다. 미용실, 주방용품, 속옷 등은 다 생필품이다.
회사 다닐 때 항목별 예산서와 결산서를 정리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중고 자동차를 산 뒤엔 생활비에 자동차 관리비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고정비에 자동차세와 보험료, 자동차 수리비를 한꺼번에 자동차 항목으로 넣었다가 비정기적이고 금액도 매번 달라져서 몇 년 뒤 생활비로 옮겼다. 고양이 가지가 집으로 온 뒤로는 고정비에 고양이 항목이 생겼다. 사료와 모래, 장난감 등 각종 물품 구입비와 병원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출하는 항목이다.
수입은 월급, 작가, 알바, 기타의 네 항목으로 분류한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월급과 기타 둘이었는데 월급을 받지 않고 본격 프리랜서가 된 후로는 수입의 종류가 늘어났다. 퇴사 후에도 월급 항목은 없애지 않았는데 2021년에는 실업급여, 2023년과 2024년에는 지원사업인 예술로 프로젝트로 5개월 이상 일정 금액의 반복 수입이 있어서 그냥 두었다. 앞으로도 정기적인 수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항목을 없애지 않을 생각이다. 2022년에 월급 0원이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또 그때 수정하면 된다.
작가 수입은 원고료와 강연료, 인세, 글쓰기 수업료 등 글을 쓰거나 책에서 출발한 수입이다. 직접 책을 팔거나 뉴스레터 구독료 명목으로 내 통장에 바로 찍힌 돈도 여기에 해당한다. 알바 수입은 자료집의 원고를 쓰거나 기획이나 편집일을 하고 번 돈이다. 작가 경력을 기반으로 한 일이어서 작가 수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작업으로 한 일과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을 구분하고 싶었다. 작가 수입이 너무 적으면 분발하려고. 지금은 알바 수입이나 작가 수입이나 둘 다 적어서 비슷하다. 아직도 가끔 가족들이 용돈을 주기도 하니 세금 환급금이나 이자 수익 등 기타 수입 항목도 있다.
수입과 지출이 매달 크게 다르지 않고 금액이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라서 모든 항목을 세세히 정리하고 살펴볼 수 있으니 고정비와 생활비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계부의 효용은 예산 수립이라는데 몇 년의 데이터가 쌓이면 항목별 예산을 짜기도 쉽다. 물가 상승이나 투자를 고려하면 어렵게 자산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할 테지만 그냥 많이 못 버니까 아껴 쓰는 거다. 아껴쓰는 데 익숙하니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한 달 지출이 비슷비슷하다. 대략 예산을 세우기는 하는데 매번 잔액을 확인하진 않는다. 저소비 생활이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관리가 된다. 수입과 지출 총액 차이를 보고 이번 달이 적자인지 흑자인지, 지난달의 적자를 메꿀 수 있겠는지만 힐끗 본다.
지난겨울 프리랜서의 보릿고개를 실감했다. 2월 수입이 335,050원이었다. 2023년 3월에도 449,410원이었지만 그때는 1월과 2월에 벌어둔 돈으로 살 만 했기에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 몰랐다. 올해는 1월에도 겨우 적자를 면할 정도의 수입만 있었고 4월 지나 5월까지도 딱히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막막했다.
엑셀 시트엔 지난 8년간의 가계부가 저장되어 있으니 2022년 시트도 들춰봤다.
세상에! 3월 6,346원, 4월 91,058원, 5월 260,823원이다. 그때는 이사 준비하느라 돈 때문에 불안할 틈이 없었다. 모아놓은 돈으로 살고, 보증금에 적금에 각종 큰돈을 다루느라 수입이 요만큼밖에 안 되는 게 남의 일 같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캐시백이나 카드깡을 수입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그 정도 수입이 잡힌 거다. 친구들이랑 같이 밥을 먹고 내 카드로 결제한 경우 친구들이 보내준 돈을 수입으로 잡았다. 수입이 아닌데 수입으로 잡히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그날 이후로 대신 결제와 받을 돈이라는 항목을 생성했다. 4만 원을 신용카드로 한 번에 결제했어도 식비 1만 원, 대신 결제 3만 원으로 구분하는 식이다. 그래야 가짜 수입이 잡히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2022년 3월과 4월은 정말로 수입이 0원에 가깝다. 그래도 불안하지 않았으니 사람 마음이 참으로 신기하다. 뭔가 할 일, 집중해야 할 대상이 있으면 괜찮은가보다.
앞으로 올해처럼 수입이 전혀 없는 겨울과 봄을 잘 지나려면 재정 주기를 한 달이 아니라 1년으로 설정해야 한다. 사실 겨울에 먹고살 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예비비는 정말 가지 병원비나 내 병원비, 집을 사고 차를 사거나 컴퓨터를 바꾸는 등의 특별한 일에만 쓸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농부처럼 추수철에 번 돈으로 1년을 살아야 한다. 예비비를 꺼내 쓰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말자. 이번 달에 번 돈 중 일부를 겨울 생활비로 비축해 두고 그걸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이미 1년에 얼마를 쓰는지는 엑셀 시트도 알고 나도 안다. 1년에 얼마를 벌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아무리 돈을 조금 번 것 같아도 매해 적자는 아니었다. 자신을 믿자. 8년 치의 가계부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