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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을 기다리는 마음

by badac
IMG_1258.JPG 그림: 얀얀

작년 겨울은 많이 불안했다. 정해진 일도 수입도 약속된 미래도 없으니 당장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랐다. 고마운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매일 성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쓰는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누구도 청탁하지 않은 원고를 쓰면서 보냈다. 수입이 없는 겨울에는 쿠팡 물류창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음악가의 소식을 들었다. 수 년간의 경험으로 그 시기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취미와 공부에 집중한다는 배우의 조언을 들었다. 2월에 도시락집 아르바이트 면접에 갔다가 떨어졌고 3월에 이력서를 두 번 더 보냈다가 서류 전형에서 탈락했다.

어떻게든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니 봄이 왔다. 예술인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책을 만들고 여름부턴 책을 팔러 다녔다. 다른 예술가들과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다른 지원사업에도 선정되어 가을까지 매주 회의를 하고 전시를 했다. 돈을 받고 할 일이 생기니 바빠졌다. 바쁘게 지내다가 병이 나서 앓아누웠다. 조금 나으면 약속된 일을 하러 출장을 다녔다. 12월이 끝나갈 즈음엔 올 해를 어떻게 보냈나 궁금해서 보여줄 상사도 없으면서 ‘2024 사업평가보고서’를 썼다.


올 겨울의 불안에 대비하여 봄부터 상담 예약을 미리 잡아두었다. 작년엔 가을부터 다가올 겨울이 걱정되었는데 올해는 걱정할 새 없이 바쁘고 아픈 사이에 겨울이 와버렸다. 상담 선생님 앞에서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틀림없이 이제 우울할 때가 됐는데 이상하네요. 아직 아닌가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분명 몇 주 지나면 우울해질 거에요. 지난 해에도 그 전 해에도 일이 없거나 수입이 없으면 늘 걱정이 많았잖아요. 제 우울과 불안에 대해서 아시잖아요. 우울해야하는데 왜 안 우울한 걸까요. 그게 또 걱정이에요."


7년 째 나를 봐온 상담 선생님은 좋아져서 그렇다고 했다. 다음 상담은 굳이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잘 지내다가 정 힘들면 다시 연락하라고 한다. 나는 정말 나아진 걸까. 2023년의 봄의 나는 선생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 상담을 그만 하겠다고 말했다. 2년 후 2024년 겨울의 나는 괴로움을 참고 견디다가 더이상은 버틸 수 없을 때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괴로움이 사라져버렸다. 힘들 때 다시 찾아오라는 말에 겨울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아직 소식이 없다. 괜찮아진 거라고 믿지는 못하겠다. 이렇게 무사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겠지.


이런 저런 노력이 괴로움을 막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다. 12월의 절반을 투자하여 2024 사업평가보고서를 쓰면서 좋았던 점과 아쉬운 점을 정리하고 다음을 계획했다. 수입 없는 계절을 대비하여 자동차보험료 같은 큰 지출은 할부로 하지 않고 2024년에 다 끝내버렸다. 적은 금액이나마 약속된 수입은 1/3로 나누어서 수입 없는 1월부터 3월에 나누어 들어오도록 했다. 그렇게 조금의 위안을 마련해 두었다.


정 힘들어지면 다시 상담 선생님을 찾아가면 된다. 겨울을 무사히 보내지 못하고 다시 불안이 찾아와 또 실패하는 기분이 들더라도 ‘나 이 기분 알아. 작년에도 이랬어’ 하고 조금 덤덤해질 것도 같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그리고 놀랍게도 벌써 1월 중순이 지났다. 게다가 2월은 일년 중 가장 짧은 달이다. 이러다 보면 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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