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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여행

by ba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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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의 실세, 내 생활의 지배자 가지 님은 2017년에 왔다. 아기 고양이일 때부터 납작 엎드려 상전으로 모시는 바람에 식사, 수면, 놀이 모든 면에서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신다. 고양이는 자율 급식한다더니 주는 대로 다 먹어버리니 시간 맞춰 식사를 내드려야 하고, 새벽 세 시에 밥 달라 놀아 달라 호통치시는 통에 머리카락을 뜯긴다. 잠잘 때는 방에 못 들어오게, 밥 때에만 밥을 먹게, 장난으로라도 인간을 물지 않게 잘 가르치면 된다던데 어떻게 고양이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게 두나요? 이렇게 귀여운데. 제발 내 옆에서 잠을 자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밤에 못 들어오게 하나요? 밥을 못 먹으면 신경질을 내시는데 어떻게 식사량을 조절하고 정해진 시간이 아닐 때 밥을 안 주나요? 자율 급식기를 사봤지만 쾅쾅 그릇을 엎고, 잘 때 인간 방에 못 들어오게 했더니 스트레스받아서 방광염에 걸려버리는 분을 어떻게 하나요? 제가 좀 불편하고 말지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만 주세요. 그렇게 나는 가지에게 꼼짝 못 하는 인간이 되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늘 좋은 건 아니어서, 가지도 나도 건강을 위해 식탐을 줄이는 연습을 하고는 있다. 가지가 밥 달라 성을 내면 ‘그래, 나도 이렇게 먹고 싶은 걸 못 참는데 너라고 다르겠냐.’ 내가 모범을 보일 능력이 안 되니 가지에게 느슨하게 대했지만 앞날을 생각하면 이제부터는 좀 달라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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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온 뒤로 여행은 꿈도 못 꾼다. 일 보러 다른 지역에 가도 어지간하면 외박하지 않는다. 이틀까지는 혼자 지내게 두어도 된다고들 하지만 나는 과보호형 인간이라 부득이한 경우에도 36시간 전에는 돌아온다. 최근 1~2년 사이에는 24시간을 넘긴 적이 없다. 대전으로 이사 온 뒤로는 서울이든 부산이든 하루 만에 다녀오기가 편해졌지만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출장이 잡히면 집에 들러 가지를 돌볼 인간을 섭외해 둔다. 2017년에 여름에 동네 친구들 다섯 명을 시간표 짜서 가지 돌봄 담당자로 돌려놓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거나 여행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안 해본 경험을 하는 걸 좋아하고 낯선 장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서 여기저기 꽤 많이 다녔다. 가지가 와서 다르게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으니 몇 년 동안은 떠나지 못하는 데 대한 답답함이나 아쉬움도 없었다. 바빠서 힘들고 사람 때문에 괴롭고 일 없으면 불안하고 종합적으로 외로운 시간을 몇 해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럭저럭 잘 지냈다가 2021년 연말에 폭발하고 말았다.


‘답답해, 예전 같으면 이럴 때 어디 훌쩍 다녀오기라도 하면 나았을 텐데. 가지가 있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렇게 발에 돌을 묶고 강에 잠기는 기분으로 살 수밖에 없을 거야.’


이런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지내던 시절, 한 친구가 용기를 주었다. 가지를 데리고 여기로 와라. 너는 지금 환기가 필요하다. 가지도 이해할 거다. 나는 가지를 작은 내 자동차에 싣고 강릉으로 갔다. 화장실, 밥그릇, 애착 이불 등 짐을 한가득 싣고서 떠났다. 내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너를 미워하면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같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둘 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자. 한 시간 가다가 가지가 울면 멈춰서서 달래고 진정시키면서 대여섯 시간을 달렸다. 어쩔 수 없을 때는 병원에 데려간다고 최면을 걸면서 꺅꺅 대는 가지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운전했다. 그렇게 친구의 친구가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무사히 도착했고 가지는 조금 긴장한 듯했지만 금세 우리의 작은 방을 나와 화장실도 가고 물도 마시고 밥도 잘 먹었다. 그 집에 있는 다른 고양이들과도 잘 지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다음날엔 일찍 일어나 바닷가를 한참 걸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다. 평온한 바다는 아름다웠다. 서울 사는 친구가 놀러 와서 함께 설악산에도 다녀왔다. 그렇게 이틀을 강릉에서 보내고 가지와 함께 수원 사는 선배네 빈 집으로 가서 한 달 동안 지내다 돌아왔다. 가지가 선인장이고 고무나무고 자꾸 물어뜯어서 식물과 동물의 평화를 지키는 게 힘들었지 한달살이는 즐거웠다. 화분을 작은 방에 몰아넣어 뒀다가 선배에게 얘네도 생명이라며 혼이 나는 통에 불안한 공존을 택했고 나는 이종의 생물들을 부지런히 돌봤다. 그렇게 함께 여행을 다녀오니 조금 살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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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중엔 케이지에 들어가 있어요. 걱정마세요



길 출신이라 산책을 좋아해서 가지가 어렸을 때는 제주도도 데리고 가고, 서울도 데리고 가고 그랬는데 집고양이가 되고 1년 후부터는 산책은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장거리 이동이 좋을 것 같지 않아 가지와의 여행은 또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가지를 데리고 강릉으로 수원으로 돌아다닌 게 가지에게 좋을 리가 없는 걸 안다. 완주에서 대전으로 이사 올 때도 가장 안전하게 데리고 오고 싶어서 전날 내 차를 대전에 가져다 두고 익숙한 공간을 만들어 둔 뒤에 이삿짐이 정리될 동안 차에 모셔두었다. 그렇게 신경 썼음에도 이사 스트레스로 방광염이 도져 입원까지 했다. 그래도 가지는, 효묘니까 언니가 잘 이야기하면 알아들을지도 몰라. 요즘 다시 괴로워져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작년 겨울 이틀짜리 부산 출장 때 친구들에게 부탁하고 갔음에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다음 달의 이틀짜리 경기 출장은 숙박하지 않고 집에 왔다 다음날 다시 갈 생각이다. 숙소 잡기도 애매하고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다. 그 정도의 불편은 감수할 수 있다.


우리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또 여행이 필요해지면 여행을 떠나겠지. 아직은 괜찮다. 가지가 정확하게 인간의 언어로 의사를 표현해 주진 않았지만 내게 다시 바다가 필요해질 때 가지는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데리고 갈지 남에게 부탁하고 떠날지 방법은 그때 찾아봐야지. 우리는 기꺼이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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