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행보_完州行步06
집주인의 말, 말, 말.
계약서를 쓰고 일주일 뒤 드디어 기존 세입자가 나갔다. 이번에도 역시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집 상태를 보러 갔다. 집주인과의 기싸움에서 쉽게 보이지 않으려고 줄자를 꿰차고 괜스레 이것저것 재보면서 흐음, 하고 둘러본다.
쓰레기장 같던 집이 비워지고 나니 더 심난해 보인다. 이 집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청소한 적 없는 것 같은 화장실과 싱크대를 보면서 세면대랑 용도를 알 수 없게 뻥 뚫린 베란다 외벽 문제는 꼭 절대 양보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다른 건 정 안되면 사람 불러서 깨끗이 대청소를 싸악 하면 괜찮을 것도 같다. 집주인 아저씨도 너무 더러운 게 미안한지 도배, 장판도 새로 해주고 등도 갈고 싱크대, 찬장, 세면대도 다시 해준다 한다. 나야 땡큐지.
이런 조항을 계약서에 다 써야 한다고 했는데 해준다고 해놓고 안 해주는 경우도 있나, 해주려고 했다가 너무 따지고 들면 집주인이 기분 상해서 뭐라고 하면 어쩌지, 집을 구할 때 원래 이렇게 애매모호한 건가, 내가 처음이라 잘 못하는 건가, 시골이라서 분위기가 좀 다른 건가. 몰라서 불안한 것 투성이지만 적극적으로 뭘 하지는 못하는 그런 상태로 시간만 보냈다. 그냥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다.
계약서 명의자란에 사인이 없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으니 그것만이라도 해결해야겠다. 확정일자 신고하려는데 대리 사인이라도 내가 할 순 없으니까 사인 좀 해줍시사 했다. 별 말없이 해주곤 공사일정 확정되는 대로 연락 주기로 했다. 근데 이 아저씨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전화하는 게 특기신지 저녁 무렵 전화를 해서는 아까는 자기가 너무 정신없어서 이것저것 너무 다 해준다고 한 게 아닌가 싶단다. 견적을 한 번 볼 테지만 너무 많이 들면 꼭 필요한 것만 하는 걸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번호키 달아놨으니 나보고 다시 한 번 가보란다.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이것도 여러 번 해보면 이력이 날까
친구랑 같이 가봐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집주인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처음에 해주기로 한 거 다 해준단다. 공사 끝나고 주말에 입주하기로 했다. 그래, 다행이다. 그래도 진짜로 내가 그 집에 들어가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집 수리는 제대로 될지, 집주인은 그 사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독립 생활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집을 구하는 일이다. 가진 돈에 맞게 가능한 집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중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을 기준 삼아 버릴 것과 살릴 것으로 나눈다.
내가 했던 그간의 선택 중에 비슷한 건 여행지를 고를 때와 직장을 알아볼 때다. 이 돈으로 갈 수 있는 곳,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것, 떠난 뒤에 생각과 달라 실망하는 것까지 선택 이후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직을 할 때에도 지금 여기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부분만 해결되는 다른 곳을 찾았지만 옮긴 곳에서 생기는 새로운 문제는 그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선택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려려니 할 것.
좋은 집주인을 만나는 것도 복이다. 나는 집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주변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렇다 해도 선택은 결국 내 몫이다. 이 집으로 하겠다는 결정, 집주인과의 협상,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들까지. 다른 이에게 미루거나 왜 그때 말 안 해줬냐고 원망할 수는 없다. 들어와서 살다 보니 방충망이 있기만 할 뿐 덜렁거려서 모기가 들어오고 화장실 문은 꼭 안 닫히는데 적응하면서 그냥 살아야겠다. 아저씨한테 전화해보고 따지는 것보다 그냥 내가 적응하거나 살짜기 알아서 해결하는 게 나한테 더 편하다. 그에 따르는 비용이나 불편을 감당하는 게 더 쉽다.
월세 처음 살아보는 여자
다시 전화하기 선수인 집주인 아저씨가 아니나 다를까 또 전화를 했다. 기존 세입자가 나가고 내가 들어가는 사이에 며칠이 비는데 여유가 된다면 미리 보증금을 보내주면 어떻겠냐고. 월세는 입주하는 날 주면 된단다. 아, 그래요. 잠깐 머뭇거리다가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월세는 후불이 아니고 선불인가요?”
“당연하죠. 월세 처음 살아보시나 봐요?”
그래 나 월세 처음 살아본다. 처음 살아본 티를 내는 것도 세입자 입장에선 불리하다는데 또 실수한 건가. 당장 보내줄 거라 생각할 거 같아서 퇴근하고 집에 가서 이체하겠다고 다시 전화했다. 그길로 당장 차일피일 미루던 확정일자 신고를 하러 갔다. 계약서만 있으면 입주 전이라도 면사무소에서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신고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