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 하는 사람
주말 내내 잠을 많이 자서일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지난주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난주에 천근이었다면 오늘은 백근 정도.
오늘도 역시 새벽 4시에 가지가 와서 깨웠고 반사적으로 일어나 밥을 주고 도로 누웠다. 5시만 되었어도 그대로 일어나서 새벽달리기를 나가거나 아침 글쓰기를 했을...리가 없다. 자연스럽게 6시에 눈이 떠지던 기력 성수기 시절이 아득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니.
다시 잠들었다가 왠지 출근시간이 다가온 것 같아 눈을 떠서 옆에 내팽개쳐놓은 휴대폰을 보니 6시 50분. 어젯밤에 씻고 잤으니 오늘은 간단히 세수만 하면 된다. 밥 하려고 쌀 불려 놓은 게 있으니까 7시엔 일어나서 앉혀야하는데... 역시나 일어나기 싫다. 8시 20분에만 집을 나서면 되니까 7시 30에 일어나도 되지 않을까. 밥 하는 데 30분도 안 걸릴 텐데. 늦게 일어날 핑계를 대기 위해서 뒤척이다가 그래도 일어나야지 하고 앉았다. 7시 10분이었다.
밥솥을 올리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도시락으로 유부초밥을 만들까 생각했지만 손은 냉장고 속 시금치에 가 닿는다. 한 번에 먹을 양은 넘는데 어쩌자고 모두 꺼내 씻는다. 시금치를 삶아서 유부초밥 안에 넣을 생각이었을까 생각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는다. 어쨌든 시금치를 무치려고 다진 마늘과 양파, 간장을 준비해서 양념을 만들어놓았다. 사논 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표고버섯팩을 뜯어서 두 개 꺼냈다.
도대체 뭘 만들고 싶은거지? 그냥 손이 제 가고 싶은 대로 간다. 그 사이 방울토마토를 씼고 오이 당근 파프리카를 꺼냈다. 조금씩 썰어서 도시락통에 담는다. 방울토마토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치면 상하지 않고 오래간다는 말이 생각나서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밥이 다 되었고 데친 시금치도 꺼내 식힌 뒤 물기를 짜냈다. 커다란 양푼에 넣고 양념과 비빈다. 유부를 꺼내 초밥을 만들까하다가 말았다. 시금치를 반 덜어내고 양푼에 밥을 부어버렸다. 시금치를 건져 낸 물에 표고버섯을 살짝 데쳐 익혀냈다. 조리대 위는 난장판이다. 밥을 비비다 말고 끓는 물을 방울토마토에 붓는다. 오이고추는 썰어서 고추장에 무쳤다. 남은 방울토마토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넣어 냉장고에 넣었다. 파프리카 오이 당근이 들어갈만한 통을 찾아서 두세 개에 나눠 담았다. 밥을 도시락통에 담고 각종 채소들도 통에 담고 반찬으로 먹을 김치와 단무지도 챙겼다. 8시 10분. 한 시간 안에 후다닥 정신없이 많은 일을 했다.
6시 정각에 퇴근해서 집에 오니 40분이 채 되지 않았다. 아침에 도시락 싸고 남은 시금치 덮밥이 냉장고 안에 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지만 저녁을 안 먹기는 허전해 마른 미역을 꺼내 불린다. 저녁 차릴 기운을 내기 위해 견과류 한 봉을 꺼내 요거트에 말아 먹었다. 미역국을 끓일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참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을 볶다가 물과 미역을 붓고 그냥 끓였다. 감자 세 개, 표고 버섯 세 개를 썰어 넣었다. 간장으로 간을 했다. 싱거운가 싶으면 간장을 더 넣어가면서 계속 끓였다. 냉장고에서 꺼낸 찬밥을 큰 그릇에 넣고 미역국을 위에 부었다. 반찬도 없이 국밥을 떠먹었다.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제대로 차려 천천히 먹는 식사가 아니란 점에서 아주 행복하거나 만족스럽진 않다. 그래도 어제처럼 종일 무기력하게 있다가 배고프지 않은데도 대충 뭐라도 해먹기 위해 밥을 하고 국수를 삶을 때보다는 기분이 괜찮다. 회사에 가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도시락을 싸가야 하니까 그냥 움직인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인 관성이 남아있어서 저녁에 집에 와서도 국을 끓일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 지켜야 할 약속은 어떻게든 하는 사람, 매번 다짐으로 일기를 마무리 하는 사람. 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느껴지면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롭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도 기어코 뭐라도 하고야 만다. 그래서 더 힘들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만하는 사람. 그러다 구름이 걷히듯 무기력이 밀려난다. 가만히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라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못 하는 사람이라서. 자동으로 뭐라도 다짐을 하고 마는 사람이라서. 4월에는 매일 뭐라도 쓰기로 했으니까 이렇게 오늘을 기록한다. 이렇게 성실한 하루가 결국 나라는 걸 인정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