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툭해진 연필을 연필 깎기에 집어넣고 돌린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끝이 점점 뾰족하게 변해간다.
어릴 적 내 글쓰기 친구는 나무 냄새가 연하게 나는 연필이었다. 누런 종이 위에 조심스레 한 획 한 획 그어가면 그 속도에 맞춰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들도 함께 쫓아간다. 그러다 내용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가루 떨어지는 지우개로 박박 지운다. 그래도 꾹꾹 눌러쓴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지울 수는 있지만, 가능하면 지우기 싫은데. 연필을 쥔 손의 속도를 좀 더 늦췄다.
2026년 3월 25일. 보고서를 쓰기 위해 노트북 워드 프로그램을 켠다. 깜박거리는 커서를 잠깐 응시하다가 부담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키보드를 누르는 손동작은 분주하면서도 한없이 가볍다.
카카오톡 메시지 기능도 업데이트되면서 이미 보낸 것조차 수정이 가능하다. “수정됨”이라고 작게 표기가 되긴 하지만, 그렇게 크게들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분명 예전보다 움직이는 손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다. 지금은 생각을 정리하지 않고도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일단 문장을 내뱉고 보는 일도 종종 생긴다.
그런데 이렇게 고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쉽게 말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혹시 말의 무게를 잊고 툭 내던져 상대방에게 생채기를 내진 않을지. 가볍게 말한 게 일파만파 퍼져 주워담을 수 없게 되진 않을지. 이런 생각은 기우일까.
점점 가벼워져만 갈 텐데, 과연 나는 어떠한 마음으로 써 내려가고 싶은 걸까.
가벼운 것도 무거운 것도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밖으로 한 번 내놓은 생각에는 책임을 지고 싶다고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