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보다 오래 남는 것은

by 비코토

1-1


첫사랑은 내가 첫 연애의 실패에 힘들어할 때 다가왔다. 미국에 교환학생을 간 와중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런 내가 걱정이라도 됐는지 그는 매일 연락을 해왔다. 시차도 개의치 않고 내 시간에 맞춰 그 시절 많이 사용했던 네이트온 쪽지를 보내며 안부를 물었다. 생일에는 미국에서 쓰라고 구글 기프트 카드도 메일로 보내줬다.


다만 한 발자국은 남겨 놓는 사람이었다.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전 남자친구보다도 나에게 신경을 써 주는 그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온정에 기대어 힘을 내 앞으로 나아갔다.


1-2


“좋아했던 거 알면서, 너무한 거 아니에요?”


파인 다이닝을 사준다고 해서 부푼 마음에 나갔던 나는, 밥을 먹는 도중 홧김에 말을 뱉고 말았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달라니. 순간 성질이 나서 질러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면 내 마음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못 본 척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그저 사람 좋게 허허 웃을 뿐이었다. 역시나 무언의 긍정.


그렇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에게 나는 뒤늦은 고백을 하는 것으로 첫사랑에 끝을 고했다. 단지 그의 여동생 같은 존재로는 남고 싶지는 않았다.


우스웠던 건,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해 버리고 집에 돌아가던 길. 그는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보고는 쓸어 넘겨주었다. 말투가 조금 더 다정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의 박동이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해졌고, 그 후로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나에게 꿈을 꾸게 해주고, 날아갈 수 있는 힘을 준 첫사랑에게 안녕을 고한 날이었다.



2-1


그로부터 10년 뒤. 내 옆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첫사랑에 대한 마음을 접을 당시에는 후련하기까지 했지만, 그 뒤로 내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연애는 잠시 접어 두고 운동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를 만났다. 그는 쉽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끈질기게 먼저 연락하고, 만나자고 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이래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한 뼘이라도 가까워지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점차 무뚝뚝했던 그의 표정에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2-2


그가 마침내 내가 내민 손을 잡은 순간, 소리라도 지르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고 싶었다. 내 손을 꽉 그러쥔 그의 손아귀에 느껴지는 굳은 살들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회사를 이직했다. 전혀 새로운 직무를 하다 보니 힘에 부쳐, 그에게 자주 우는 소리를 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가 생각해도 질릴 만큼 쏟아 부었지만,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묵묵히 나를 안아주었다.


결혼하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을 때, 자주 보채고 원망하고는 했다. 울면서 그의 가슴을 두드릴 때에도 내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와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리고 6개월 뒤, 우리는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3


나에게 다가온 사랑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끝내 곁을 내어주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내가 내민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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