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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을마음 Sep 05. 2023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만두 박사. 박완서 소설가는 만두를 좋아하는 아들을 그렇게 불렀다. 만두 박사는 앉은 자리에서 엄마가 해 준 만두를 스물다섯 개나 먹었다고 누나에게 자랑하던 볼이 붉은 소년이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박완서 소설가가 생전에 쓴 책에는 그때의 심경이 절규처럼 담겨 있다. ‘그 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이제 순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 맏딸 호원숙 씨가 엄마가 해 준 음식들에 대한 책을 냈다. 만두 박사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만두를 빚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때가 되면 다시 만두를 하던 엄마의 모습이 맏딸 호원숙 작가의 책에 담겨 있다. 만두 박사도, 만두를 해 줄 엄마도 떠난 뒤의 글이기에 담담하게 쓰여진 것 같다.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는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7살 딸아이의 모습을 VR속에 담아 부모에게 보여 주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생전 아이의 모습을 바탕으로, 모션캡쳐 기능을 이용해 다른 아이의 움직임을 아이의 모습으로 덮어씌웠다. 녹음된 실제 목소리는 AI에 딥러닝을 시켜 분석하고, 다른 아이가 녹음한 대사를 딸아이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다. VR기기를 착용한 부모는 기계가 만들어 준 아이의 생전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 주고 생일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몸을 굽혀 아이를 안으려 했지만 안을 수 없었다. 엄마의 목에는 아이의 뼛가루가 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박완서 소설가의 말처럼, 사람에 대한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속에만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간이 더 지나 호원숙 씨도 떠난 어느 날에는, 만두 박사가 좋아한 어머니의 만두 맛은 누구도 떠올릴 수 없을 테다. 몇 년 사이 기술은 더 발전해서 목소리와 외모를 완전히 숨긴 버튜버 열풍이 불고, 게임산업에서는 AI를 이용해 캐릭터의 대사를 즉석에서 만들어가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수의 목소리를 딥러닝해 다른 가수의 노래를 커버한 곡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목걸이 속의 아이를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책의 생명력은 사람과는 사뭇 다르다. 만들어진 책이 생명을 얻는 시간은 사람이 그 책을 손에 들고, 책을 펴고 책의 속살과 얼굴을 마주할 때다. 한 페이지에서 다음 페이지로 거쳐 가는 손길을 통해, 새 페이지에 닿는 숨결을 통해 책 속의 이야기가 살아난다. 영원히, 누구도 읽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는 오랜 시간을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한 질문이 나왔다. 절대자의 시간 속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이며 같은 존재가 수없이 많은데, 이 순간에도 수많은 부름이 있을텐데, 한 인간에 대해 얼마나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겠지만 손가락이 수십억 개라면 이야기가 다를 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지금의 아픔과 기쁨도 그저 지나간 것 아니겠냐고.


나는 책과 영화, 드라마로 그 물음에 답했다. 영화 속 저 배우가 실제로 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사람은 거기에 공감할까? 책 속의 이야기는 결말까지 이미 다 정해져 있는 과거의 일인데 왜 거기에 울고 웃을까? 


답은 ‘시간’이다. 그 책을 펴는 순간 나와 책의 시간이 시작된다. 시간이 공간처럼 창조의 영역이라면, 절대자는 당신의 이야기를 지금 이 시간 재생 버튼을 누른 것이다. 그래서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살아 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항복 없는 싸움으로 예루살렘을 지킨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그곳을 넘겨 준다. 대신 예루살렘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길을 택한다.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살라딘은 답한다. “아무것도 아니지(Nothing).” 그 말에 끄덕이는 발리앙을 돌아선 살라딘은 몇 발자국 지나 다시 뒤를 돌아보며 다시 답한다. “모든 것이기도 하고(Everything).”     


글쓰기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쓰는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면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지금까지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무 의미도 없는 하얀 공간에 내가 만든 얼룩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 이 시간과 공간에 놓인 ‘사람’이 썼고 사람이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쓴다. 언제 누군가의 눈에 의해 열려질 지 모르는 그 세계를, 지금 만드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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