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친구 둘이 결혼을 했다. 신랑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오빠, 신부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한 교회에 함께 다녔고 둘은 고등학생 때부터 연애한 후(중간에 헤어졌었지만) 결혼했다. 둘은 결혼 소식을 내게 알리며 축가를 부탁했는데 결혼식 당일, 하필 나는 지각을 했다. 식장 건물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어디냐는 전화가 왔다. 주례가 끝나서 빨리 와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헐레벌떡 뛰어 건물로 들어가 18층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친구들이 있는 테이블로 곧장 달려가 착석했는데 그때 사회자가 축가 순서를 알렸다. 숨도 못 돌렸는데 축가라니, 주례는 왜 이렇게 빨리 끝난 거야 당황하며 마이크를 집어 들었고 마주 선 신랑 신부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왔냐? 하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땀이 채 식기 전에 성시경의 두 사람 반주가 식장에 흘러나왔고 나는 첫 소절을 정신없이 부르다가 어느 부분에서 완벽히 가사를 잊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데 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과 함께 입모양으로 가사를 알려주었다. 그래도 내가 결혼식 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거 아닐까 하고 가끔 큰소리 치면 그들은 지각도, 가사 잊어버리는 것도 예상했다며 웃는다. 아무튼 그날 요란한 시간이 지나고 결혼식이 마무리되었을 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고등학생 이후로 보지 못했던 교회 사모님과 그의 딸, 아들이었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단번에 그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포대기로 감쌌던 막내는 어느새 자라서 키가 내 어깨 가까이 커있었다. 지금은 어디 계시냐고 물었더니 케냐에서 지낸다고 하셨다. 친정에 일이 생겨 한국에 잠깐 들어왔다가 결혼 소식 듣고 왔다고, 둘이 결혼할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하셨다. 그러다 아프리카 여행 생각 있으면 오라며 메일 주소를 알려주셨고 나는 1-2주간의 고민 후 할부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케냐로 날아갔다.
케냐에서의 인연은 한 선교센터와 이어졌는데 그 센터는 빈민가 뒤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울퉁불퉁한 도로와 낮은 판자를 덮어 놓은 집들을 지나면 깔끔하게 정돈된 도로와 함께 센터가 나왔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가 생생히 기억나는데 대문 앞에서 경적을 울리자 곧 안쪽에서 문을 열어주었고 문을 열어준 흑인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후에 그 친구 이름이 칼빈이라고 소개받았다.) 차에서 내리자 넓은 초록 마당에 높고 굵게 뻗은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고 마당 한편에서 무언가 작업 중인 친구가 있었다.(그 친구는 레이먼. 성실하고 착한데 일을 잘 못해서 꼭 한 번씩 실수를 저지르는 편이라고 선교사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실제로 레이먼은 성실하고 착하고 웃음도 많지만 일을 할 때마다 실수하는 친구였다. 아마 그 친구와의 대화 중 50%는 ‘괜찮아, 레이먼.’이었을 것이다.) 넓고 편편한 베이지색 돌로 깔아 놓은 인도를 따라 걸으니 기력이 다해 쓰러질 것 같은 개 두 마리가 나를 맞았고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빠르게 지나가는 나를 아주 느린 속도로 고개와 몸을 돌려 보고는 어기적 어기적 따라왔다. 선교 센터는 여러 채의 건물 중 한 건물을 뜯어고치고 있었다. 바닥에 깔 나무 조각들을 나르고 뭔가를 부수고 옮기는 소리들이 들렸고 곧 센터의 책임자인 사무엘 선교사님과 수 사모님을 만났다. 새하얀 머리칼에 백호와 같은 강렬한 인상의 사무엘 선교사님은 거침없이 달려드는 맹렬한 호랑이라기보다 매섭게 눈이 휘날리는 설산 나무들 사이에서 굳건히 서 있는 호랑이 같은 느낌이었다. 그에게는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것 같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압도적인 아우라가 있었다. 그는 실제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작업을 할 때나 대화할 때 자신만의 고집이 느껴지곤 했다. 아, 고집이라기보다 중심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래서인지 한 마디를 해도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의 아내인 수 사모님은 어쩐지 나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되도록 함께 있는 자리를 피했는데 그녀는 통찰력과 누군가를 보듬는 능력이 대단했고 그녀 또한 자신만의 강단이 뚜렷한 분이었다.
선교 센터에는 주로 빈민가의 아이들이 왔는데 매주 토요일마다 와서 성서를 공부하고 밀크티 한 잔과 식빵 한 조각을 먹었다. 그곳에 오는 아이들은 각자 교회의 리더였고 성서를 공부하면 주일에 교회에서 그것을 나누고 가르치기 위해 배우는 아이들이었다. 선교센터에서 숙식을 시작한 시점부터 나는 그 아이들에게 찬양곡을 한 곡씩 가르쳐 주었는데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태도로 어정쩡했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잘 부르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며 피아노 반주를 쳐주면 수줍어하면서도 열심히 부르곤 했다.(그중 한 친구는 피아노 코드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따로 알려주었는데 내가 떠나기 전 알려준 코드를 모두 외워 내게 들려주었다.) 수업한 지 3주 정도 되었을 때 문득 이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센터 사모님과 그 당시 함께 지냈던 메리 언니(아버지는 마사이족, 어머니는 에티오피아인이라고 했던 거 같다. 그녀는 내가 보기에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아름다운 여자였다.)에게 센터 오는 아이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왠지 애매한 분위기의 답변이 돌아왔다. 좋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해도 된다고 말하는 답변의 분위기가 묘했다. 수 사모님은 해도 좋은데 공짜로는 주지 않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고 고민 끝에 마지막 수업 날 경연을 열어 순위를 나누되 선물 내용은 큰 편차 없이 조금씩 바꾸어 모두에게 주는 방향으로 정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자동차 바퀴 교체 겸 마트에 장을 보기 위해 모세라는 친구와 사모님, 나 셋이서 시내를 나갔는데 그때 사모님이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물적 후원과 도움을 받는데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은 모든 후원 단체가 이 빈곤 국가를 망쳐 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나를 한 번 쓱 보고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사모님은 말을 이어 갔다. 도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닌 지금의 후원 시스템으로 인해 이들은 스스로 성취하지 않고 도움만 받으려 한다, 그들에게 소위 거지 근성을 심어준 꼴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신선하고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공짜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신 거구나 하고 중얼거리자 “절대!”라고 단호히 말씀하시며 지금 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 모두 숙식과 돈을 주고 있지만 센터 일을 하기 때문에 제공하는 것이라며 아이들에게도 공짜로 주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사모님의 말을 곱씹으며 어떤 것도 완벽할 순 없고 도움이 때론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겼다.
그 후 며칠 뒤 사모님과 함께 잠깐 외출 후 센터로 돌아가는 길에 일곱, 여덟 살로 보이는 흑인 꼬마 세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돈을 달라고 구걸했다. 나이로비 안에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크루를 데려와 건물을 상당히 많이 올리고 있는데 흑인 꼬마들 입장에선 아시아인이면 그렇게 돈이 좀 있는 중국인으로 보고는 돈 달라는 소리를 한다고 사모님이 말했다.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뱉는 사이 사모님은 영어로 내가 왜 너네들에게 돈을 줘야 하냐고 호통을 쳤다. 꼬마들은 2, 3초간 굳었다가 다시 슬슬 웃으며 돈을 달라고 외쳤다. 사모님은 굴하지 않고 “가서 스스로 벌어!”하고 소리쳤고 아이들은 시시하다는 듯 포기하고 뒤돌아 어딘가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