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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Oct 06. 2021

epilogue. 이 세상의 ‘다양한 평범함’을 위하여

내 인생 아직 안 끝났다는 평범한 위로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그냥 ‘나’ 개인의 이야기다. 나는 엄마고, 내 아이는 장애 아이지만, 나는 그냥 ‘나’를 지울 생각이 없는 평범하고도 이기적인 사람이다.


처음 아이의 장애를 알았을 때 나는 정말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고, 남편은 더 열심히 돈을 벌어와야 할 것이며, 엄마의 시간과 관심이 오롯이 동생에게 쏠린 탓에 큰아이는 상처 받고 투명한 아이로 자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나는 절대로 평범한 남들처럼 소소한 행복에 울고 웃으며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찾고 싶었다. 내 인생에 ‘장애’라는 키워드가 끼어들어도 별일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증거를. 그런 이야기를 너무나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알려진 장애 아이의 이야기들에서 많은 경우, 아이가 주인공이고 엄마는 뒤에 가려져 있었다. 심지어 엄마가 써 내려간 서사에도 아이만 있고 엄마 자신은 없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아이의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눈물겨운 희생의 아이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밝고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한없이 퍼주고, 주변에 용기와 감동을 전하는 캔디 같은 캐릭터, 강한 어머니, 장애 아이를 훌륭하게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 혹은 장애 아이를 낳아서 슬픈 존재, 장애 아이를 낳은 죄(?)를 혼자 떠안고 아이와 함께 소멸되어 버릴 것만 같은 그런 존재……. 장애 아이가 주인공인 무대에서 조연인 엄마가 주로 담당하는 역할이란 이런 것들이었다.

이 극의 연출가인 ‘사회적 통념’님은 요구한다. 사람들이 당신을 위대하다 칭송할 테니 힘들어도 아이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헌신하라고. 그래야만 당신과 당신 아이가 무대에 오를 수 있다고. 그게 안 되면 장애 아이 데리고 조용히 쭈그러져 무대에서 지워진 사람으로 살라고. 아무도 그냥 평범한 장애 아이와 장애 아이의 엄마는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미안하지만 그 요구 거부한다.

나는 내 아이가 주인공인 무대에 조연으로 올라 헌신의 아이콘을 연기할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무대 밖으로 밀려나 있는 듯 없는 듯 아이도 나도 지워진 존재로 살 계획도 없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무대에 오르고 싶다. 그리고 내 아이는 또 다른 무대에서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나도, 장애 아이도, 비장애 아이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 땅의 누구라도 각자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를 가질 자격이 있다. 그 무대가 아무리 작고 허름하더라도, 관객이 몇 안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드라마에서 모두 주인공이어야 한다.

나는 그냥 내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아이의 서사에 ‘1+1’으로 끼워 팔리는 것 말고, 아이의 장애를 처음으로 마주한 엄마, 아니 ‘그냥 나’라는 사람 1인분의 서사를 기록하고 싶었다. 누구도 처음부터 엄마였던 적이 없다. 엄마인 지금도 나는 그저 이기적인 나일 뿐이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 평범하게 별일 없이 살고 있다.

평범의 기준과 범위를 조금 넓게 잡았을 뿐이다. 정규분포의 가운데 토막에 존재하는 주류의 모습만이 평범한 것은 아니다. 정규분포 끄트머리 어딘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주류의 삶의 모습들도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이웃의 사는 모습이지 않은가. 이 세상엔 다양한 평범함이 있고, 나도 그들 중 하나로 내가 만드는 작은 무대 위에 주인공으로 등판했다.


2021년 가을, 나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다. 남편과 나는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아이들도 함께 돌본다. 물론 우리에게는 운이 좋게도, 든든한 육아 지원군 우리 엄마가 계신다. 엄마가 나보다 더 살뜰히 우리 아이들을 챙겨주고 계시기에 내가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가 나이가 드시며 점점 몸이 힘들어지는 걸 보는 게 영 마음이 불편하다. 국가에선 맞벌이 가정에게 장애아동 돌봄 지원을 해 주지 않으므로 내 돈 들여서 둘째의 재활에 우리 엄마와 동행하며 아이를 들어 안아 주실 분을 구했다. 여성인 내가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의 돌봄 노동을 돈 주고 사는 것, 이 얼마나 평범한 서사인가.

내 아이 둘째는 다섯 살이다. 아직 말하지도 걷지도 않는 아이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기어 다니며 온 집안을 누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 같지만 하이체어를 식탁 옆에 가져다 놓고 이유식 파우치를 흔들어 뽀각뽀각 소리를 내면 귀신 같이 온다. 어쩔 땐 “아가, 맘마 먹자, 이리 와. 맘마 먹으러 와.” 하면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이 장난감 탐색에 집중해 있다가도 웅웅 거리며 식탁으로 기어 와서 양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턱 받치고 있다. 빨리 안아서 하이체어에 앉히라는 소리다. 아기 때 그렇게도 안 먹고 분수토를 해 대던 아이는 이제 이유식 140미리 파우치에 흑미밥 한두 숟갈을 섞어 참기름 얹은 밥을 꿀꺽꿀꺽 잘도 받아먹는다. 하루에 세 끼, 어쩔 땐 네 끼도 먹어서 양육자는 정말 ‘돌밥돌밥’이 따로 없다. 이 또한 얼마나 또 많이 들어봄직한, 하나의 평범한 서사인가.

아이는 주중에 매일 재활을 다닌다. 내가 주중에 3일만 출근하기 때문에 이틀은 내가, 나머지 3일은 우리 엄마(와 돌봄샘)가 센터, 병원, 복지관 등지로 재활 라이딩을 한다. 매일 재활 일정을 소화하긴 하지만 우리는 아이 재활에 우리의 재정과 시간을 몽땅 갈아 넣지는 않는다. 하루 종일 아이의 재활에만 매달릴 순 없다. 하루에 한 타임 내지 두 타임, 아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정도로만 균형을 맞췄다. 그리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비용만 지불하기로 했다. 재활로 아이의 장애가 눈에 띄게 경해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매일의 생활 패턴을 만들어주고 가족 외의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하는 법을 익히도록 하려는 것이 재활의 목적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의 재활을 위해 가족 중 누구의 시간도 온전히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적당히 서로 양보하며 사는 것, 이보다 더 평범할 수가 없다.

주말에는 우리 엄마가 가능한 한 개인 시간을 가지시도록 요즘은 남편이랑 아이들이랑 넷이 자주 외출한다. 공원, 마트, 백화점, 서점… 가끔은 시가로, 어쩌다 한 번은 여행을 계획하고, 가족이 함께 외출한다. 바람만 불어도 기관지염에 걸려 날 추워지면 두문불출해야 했던 둘째가 조금 컸다고 이제 1일 1 외출을 원한다. 안 데리고 나가면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사나운 강아지다. 원래 집순이였던 큰아이도 이제 자꾸 어디를 나가고 싶어한다. 그런데 얘도 조금 컸다고 이제는 가족 외출보다도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친구랑 놀라고 큰아이는 두고 나가기도 한다. 어느 집에나 있는 평범한 이야기라 하품이 나온다.


4년 전, 나는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보라. 민망하게도 너무나 변함없이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다. 아주 잘 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평범의 한 귀퉁이에서 그냥저냥 살고 있다.

이 글이 지금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당신이 장애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혹은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어떤 커다란 벽을 만났다고 해서, 이대로 인생 끝나는 거 아니라는 증거가……. 이 글로써 지금 힘든 누군가에게 감히 평범한 위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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