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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 박사엄마 Oct 05. 2021

네가 아니더라도 나는 위태롭게 살았을 거야.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12단계: 불안한 인생, 균형 잡으며 함께 살기

마지막이니까 조금 더 솔직해져 볼까?

아이의 장애를 이제 막 알게 되었을 무렵, 짧은 낮잠에서 깨어 1시간 넘게 발악하며 울다 잠든 아이의 땀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너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평생 불안하게 살아왔는데, 이제 좀 살만 해져서 날개를 좀 펼쳐 볼까 하는 찰나에 네가 나타난 거라고. 너는 왜 지금 나에게 와서 내 인생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려고 하느냐고.

아이가 그렇게도 안 달래지고 울어대는 것이 뇌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온몸으로 힘겹게 울어대는 작디작은 아이보다 나, 내 인생을 더 가엽게 여겼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며 다시 또 우울해지곤 했었다.



나는 가난을 아는 사람이다.

8살까지는 그래도 넓은 집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해 아빠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 말로는 퇴직금이고 뭐고 할머니에게 다 갖다 드리고 무일푼이 되었다고 하던데, 살던 집도 어떻게 했는지 자세히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사를 가야 했다. 그래서 국민학교 2학년 때 나는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갔고 가족이 살 집을 구할 때까지 나만 따로 이모네서 잠시 살았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랑 엄마 아빠는 어디서 살았는지 모른다. 이모가 잘해 주셨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랑 살고 싶다고 울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후에는 잠시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족 모두 얹혀살다가 곧 아주 작은 집을 구해 우리끼리 나와서 살았었다.

그러다 3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우리는 지금까지 살던 도시 수원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아빠는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했고, 인천에서 작게 속옷 공장을 운영하던 엄마의 친척 언니가 그곳에 와서 공장 일을 배우고 같이 일하자고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의 전학이 힘들 법도 한데, 아직은 어려서 괜찮았던 것 같다.

인천에 가서 엄마 아빠는 둘 다 그곳 이모네 공장에서 일을 했다. 공장이래 봐야 주택가의 야트막한 건물에, 지하와 1층에 기계들이 있고, 위층(아마 2층? 3층? 쯤으로 기억한다.)에는 이모네 가정집이 있고, 가정집 거실에서도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속옷을 포장하는 그런 곳이었다. 나랑 동생은 학교가 끝나면 이모네 공장으로 곧장 달려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엄마랑 저녁에 집에 오곤 했다. 그리고 내가 4학년, 5학년이 되면서는 엄마 아빠 없는 집에 내가 보호자로서 동생이랑 함께 있었던 시간도 많았던 것 같다.

그곳 인천에서의 생활은 나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소심하기 그지없던 내 성격을 바꿔준 정말 ‘인생 선생님’ 두 분을 그곳에서 4학년, 5학년 때 만났고 친구들과도 더없이 잘 지냈으며 집과 지척에 있는 엄마 아빠의 일터에는 내가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어서 엄마가 일을 하고 있어도 늘 보호받는 기분이었다. 인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아직도 그곳이 너무나 그리워 아련한 감정이 밀려온다.

하지만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빠에게는 자신의 엄마 아버지가 있는 수원을 떠나 엄마의 친척 언니 부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빠는 계속 돌아가고 싶어했고, 내가 5학년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수원으로 왔다. 6학년을 앞두고 전학이라니…… 이건 정말 잔인한 일이다. 나는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정말 많이 울었고 한동안 가슴앓이를 했다. 엄마 아빠의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착하고 말 잘 듣는 딸이었으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수원으로 돌아와 작은 우유 대리점을 인수했고, 집 구할 돈이 모자라 우리는 반지하에 살기도 했다. 우리는 가난했고 아빠는 상황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엄마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함께 그 고생을 해야 했다. 아빠랑 함께 몇 군데 학교로 우유 급식을 넣으며 층마다 우유 박스를 들어 옮겨 주느라 엄마의 젊음은 그때 한번 크게 바스러졌다. 그 와중에 아빠네 엄마 아버지와의 갈등도 심화되어 사는 게 지옥이었던 엄마는 매일 입버릇처럼 딸들에게 시가 욕을 했다. 그 덕에 어릴 때는 많이 좋아했었던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즈음부터 미워하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할머니는 몰라도 할아버지는 나에게 각별한 존재였는데, 엄마에게 욕을 하도 들어, 후에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만큼 나는 그분들에 대한 감정이 메말라 버렸다.

엄마는 아빠랑 살기 싫지만 너희들 때문에 산다고, 너희만 보고 산다고 늘 이야기했다. 나는 큰딸이고 다행히 공부를 잘했고 엄마를 살게 하는 존재였다. 나는 공부를 더 잘해서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중고등학교에선 공부만 잘하면 가난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 나에게 공부를 잘하는 것은 내가 유일하게 내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권력이었으며, 엄마의 희생을 향한 나의 보은이었다. 다행히, 동생도 공부를 잘했다. 엄마는 가난했지만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두 딸이 모두 공부를 잘하는 부러운 존재로서 콧대를 높일 수 있었다.

아빠는 우유 대리점을 오래 하지 못했다. 아빠는 애초에 육체노동에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잘하는 아빠는 아마 부잣집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다면 학자가 되었을 사람이다. 내가 고등학교 땐가, 아빠는 모든 일을 관두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의 네 식구 밥벌이는 온전히 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식당에 나가 주방 일을 했다. 옛날 아빠들이 다 그렇듯, 아빠는 돈을 벌어오지 않음에도 집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식당 일과 집안일을 혼자 짊어져야 했다. 이때 엄마의 젊음이 또 한 번 스러져 갔다.

나는 이때 결심했다.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내 일을 가지고,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 내 일을 놓지 않겠다고. 남자의 경제력에 맞춰 내 인생을 좌지우지당하지 않겠다고. 절대!!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강하게 결심했다.



다행히 아빠는 공인중개사에 합격해 부동산을 개업했고, 나는 요즘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개천의 용’이 되어 SKY로 날아올랐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부동산 일을 했는데, 엄마 말로는 그때 딱 내 등록금 내주고 먹고살 만큼은 벌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 이후 나는 열심히 과외 알바를 하면서 대학을 다녔고, 하고 싶은 것이 생겨 대학원에 들어갔고, 어쩌다 보니 박사 과정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랑 비슷하게 가난을 알지만 똑똑하고 성실한(아빠 같지 않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큰아이를 낳았다. 큰아이 낳고 엄마가 아이를 봐주셨기에 나는 박사논문을 쓸 수 있었고 대학에서 강의 노동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둘째를 낳았고, 아이의 장애를 모른 채 나는 어느 학교에 (비정규직, 비전임, 이름만 번지르르한)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내 인생은 진짜 이제부터 꽃 피는 줄 알았다. 남편과 나, 둘 다 공부하느라 늦게 돈 벌기 시작해서 모아 놓은 재산은 없었지만 둘이 벌이가 괜찮았다. 양가에서 물적으로는 크게 못 도와줘도 시가에서는 신혼집을(어머님 집 아래층 투룸ㅋㅋ), 우리 집에선 육아를 도와주시는 게 큰 힘이 됐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날아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힘들었던 걸 지금부터 보상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둘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이제 좀 살 만한데, 이제 좀 기지개를 켜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내 눈앞에 떨어졌다. 나는 절대로 내 일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사람인데, 세상은 나에게 일을 관두고 네 장애 아이나 잘 거두라고 자꾸 떠밀었다.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이 위태로워진 것 같아 자꾸만 원망이 샘솟았다. 아이가 예쁘다가도 미웠고 이 험한 세상에서 이 아이를 데리고 나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한숨만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시절 다 겪고 나서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보건대, 나는 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계속 위태위태하게 살았을 것이다.

허울만 좋은 불안정한 일자리, 그거나마 지키려고 워커홀릭으로 사는 엄마를 늘 그리워했을 큰아이, 남편과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따라잡지 못할 애초부터 서울에 집 가진 사람들과의 갭, 그로 인한 박탈감과 무력감, 아이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지 못한 데에 대한 죄책감,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려는 열망과 비교, 부러움…… 이런 것들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불안하게 했을 것임이 자명하다. 어쩌면,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한 지금보다 더 마음이 괴로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둘째를 보며 ‘너 때문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둘째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 오히려 둘째 ‘덕분에’ 계속 앞만 보고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보고, 내게 중요한 것들 사이의 균형을 맞춰 가며 일도, 육아도, 가정생활도, 그리고 ‘그냥 나’도 적당히 멀티플하게 동시에 굴리는 법을 여전히, 지금도, 배우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이라도 멈추고 균형 잡는 법을 배운다는 게. 생각해 보니, 공부와 일밖에 모르던 내 삶은 정말 요즘 말로 ‘노잼’이었다. 나는 노잼의 끝판왕이었는데, 둘째가 구해준 것이다. 인생 별 거 없다고. 그냥 재미지게 살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라고 둘째가 나에게 와준 것 같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에 대해서, 엄마와 아빠를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그들도 힘겨운 싸움을 해 오신 거라고, 인생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거라고, 맑은 눈동자로 둘째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다.

나는 불안한 이 인생을 위태위태 균형 잡으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아 볼 것이다. 남편과 함께 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걸어보련다. 장애 아이와 함께 하면 더 불안할 줄 알았는데, 이미 뭐, 더 불안할 것이 없는 인생이라 오히려 대담하고 용감해진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것으로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 모든 단계를 건너왔다. 아무런 준비 없이 장애 아이를 낳고, 아이의 장애를 맨 몸으로 마주하는 그 초짜 엄마 사람의 마음을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지금 내 아이는 고작 5살이고, 이 이야기들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알고 있다. 앞으로 내가 겪을 일들은 이제 내 아이의 장애 ‘마주하기’가 아닌, 장애를 가진 아이와 ‘함께 살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사는 날들이 두렵지만 무섭진 않다. 우리는 잘해 왔고, 잘하고 있고, 또 잘 해낼 거니까.
이 땅의 모든 초짜 장애 아이 엄마들에게 진한 연대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베테랑 장애 아이 엄마들께는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chew!!
(에필로그도 있어요. 마지막 편도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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