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를 읽고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다.
“감정 불능 장애를 가진, 괴물이라 불리는 소년이
또다른 종류의, 괴물로 성장한 다른 소년을 만나 관계 맺고 성장하는 이야기” 이렇게 설명하면 굉장히 자극적인 스릴러 소설일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서술자가 감정을 못 느끼는 존재 ‘나’이므로 이야기는 대부분의 감정이 배제된 채 무덤덤한 느낌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앞부분, 소년의 엄마가 소년에게 감정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부분에서 나와 둘째아이를 본다. 나의 둘째도 보통의 사람들과는 의사소통 방식이 다르기에 보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모든 것들을 배워 나갈 것이다.
그리고 소년의 할머니가 소년을 ‘예쁜 괴물’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역시 나의 둘째아이와 우리 엄마를 본다. 아이가 어떤 존재이든 그저 마음으로 예뻐해 주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이 소설을 보면서 한없이 약한 어린 존재들에게 그들의 주변에 좋은 어른이 있는지 없는지가 그들의 성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 ‘나’는 감정이 없기에 어쩌면 뉴스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처럼 자라날 수도 있었다. 가학적인 일에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따뜻하고 유쾌한 엄마와 할멈이 있었다. 둘이서 그의 양손을 단단히 붙들고 사랑으로 지켰고, 그들이 떠난 후에는 또다른 좋은 어른이 그의 후견인으로 있어 주었다. 이들은 그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도록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타인들은 그 아이를 괴물이라 칭하지만 그는 단단한 지지 기반에서 괴물이 아닌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런 반면, 또다른 괴물인 그의 친구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랑받는 외동아들이었지만, 어린 시절 길을 잃고 이집 저집 전전하며 입양과 파양을 반복해서 당했던 인물이다. 나중에 다시 찾은 그의 아빠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그 아이를 마음으로 보듬어안지 못하는 그저 못난 어른이었을 뿐이다. 좋은 어른에게 정서적 지지를 받고 자라지 못한 그 아이는 괴물이 되는 것 외에 어떤 선택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과연 누가 괴물인가? 그 아이들이 괴물인가?
아니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아이를 괴물로 바라보는 타인들이 괴물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아이를 괴물로 성장케 방임한 무책임한 어른들이 괴물이 아닌가?
작고 약한 존재로 태어나는 한 존재를 사람으로 키우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는 사랑을 주는 것 또한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흔들리고 불완전할지라도 결국에는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할 것이다.
오늘 한번 더 우리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줘야지 생각하다가 문득,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따뜻하고 편안하게 성장하는 동안, 춥고 외롭게 방치되어 있는 어떤 아이들을 생각하며 참 미안했다.
책의 마지막은 뻔하지만 희망적이었는데, 나는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슬펐다.